길원필 목사(사랑의 교회, CO)

선교사열전 (8)

소명

가우처는 1845년 6월 7일 미국 펜실베니아 주 웨인스보로에서 태어났다. 1868년  디킨슨 대학(Dickinson College)을 졸업한 뒤, 1872년에는 A.M. 1885년에는 D.D. 1889년에 LL.D. 학위를 받았다. 가우처는 피츠버그에서 들어온 사업 제의를 거절하고 감리교 목사가 되었다. 1877년 12월 그는 마리 C. 피셔(Mary F. Fisher)양과 결혼했다.
가우처는 1885년 볼티모어 여자대학(1910년 가우처 칼리지로 개명) 설립에 많은 재정적 지원을 하였으며, 21년 목회하는 동안 15개의 교회를 세웠다.

대륙횡단열차에서-민영익과의 대화

1882년 5월 2일 조선 정부대표 신헌(申櫶)과 미국 대표 슈펠트(R. W. Shufeldt) 제독이 제물포에서 한미수호조약서에 서명함으로써 역사적인 조약이 체결되었다. 1883년 4월 미국은 정동에 공사관을 설치하고 초대주한공사로 푸트(L. H. Foote)를 파송하였다. 고종은 미국사신의 신임장을 받고, 그해 7월 26일, 답례사절단(전권대사 민영익, 부사 홍영식, 종사관 서광범, 수행원 유길준, 고영철, 변수, 현광택, 최경식 등)을 미국에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푸트 공사가 타고 온 미국군함 모노카시호를 타고 제물포에서 출항하여 태평양을 건너 9월 6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민영익 일행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미 대륙횡단열차를 탔을 때, 가우처 박사도 같은 열차에 동승하고 있었다. 동양선교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가우처 박사는 상투를 틀고 갓을 쓴 이상한 옷차림의 한국사절단에 호기심을 느껴 통역을 가운데 놓고 민영익과 대화를 나누었다. 가우처 박사는 조심스럽게 접근을 시도하였다.
“반갑습니다. 나는 코리아의 역사와 사상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과는 자주 왕래가 있는 편입니다. 국제정치적 교류만이 아니라 우호 관계로 서로를 이해하길 원합니다. 인간의 보다 근본적인 교류말입니다.”
“보다 근본적인 인간관계라는 것은 통상을 통한 어떤 것입니까? 문화 교류를 말합니까? 아니면 민간인끼리 오고가는 것을 뜻합니까?”라고 민영익은 가우처 박사의 의중을 떠보았다. 가우처는 신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네, 말하자면 그런 것이 되겠지요. 하지만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짓고, 의사가 병을 고치는 그런 일을 인간의 양심 이상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따로 있습니다. 그들이 코리아로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특별한 사람들입니까?”
“사명감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가우처 박사는 대화를 통해 민영익의 밝은 심성에서 한국인의 순박함을 발견한다.
 
 비전의 사람

민영익 일행과 같이 기차여행을 하면서 가우처 박사는 한국 선교의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가우처 박사는 그해(1883년) 11월 6일 뉴욕에 있는 감리교 선교부에 한국의 사정을 소개하고 한국 선교를 시작할 것을 제안하는 편지와 함께 선교기금 2천 불을 보냈다. 그리고 미국 감리교회에 여론을 일으키기 위하여 감리교 기관지 편집장인 버클리 박사를 움직여 한국 선교를 주장하는 글을 15회 이상 연재하게 하면서 선교 기금 모금에 앞장섰다.
그러자 여러 곳에서 선교 기금을 보내왔다. 이때 감리교 선교부의 파울러 감독은 선교위원회를 소집하여 한국 선교를 정식으로 결정하고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맥클레이 박사에게 한국에 가서 현지답사를 하고 그 실정을 보고하도록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맥클레이 목사는 1884년 6월 24일 부인과 함께 서울에 와서 푸트 공사의 관저에 머물면서 박영효, 김옥균 등의 수신사 일행이 일본에 갔을 때(1880년) 친분을 가지게 된 김옥균의 주선으로 고종 임금에게 선교에 대한 청원서를 낼 수 있었다. 그는 그 청원서에서 한국에서 학교 사업과 병원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윤허해 줄 것을 간청했다. 고종 황제는 신중히 청원서를 살피고 검토한 후, 한국에서 병원과 학교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윤허를 내린다.

기쁜 소식

청원서를 올린 지 나흘째 되는 7월 3일 맥클레이 목사는 김옥균으로부터 고종 임금이 한국에서 병원과 교육사업을 시작해도 좋다는 윤허를 내린 소식을 들었다. 한편 푸트 공사는 맥클레이 목사가 다녀간 뒤 9월 8일자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기쁜 소식을 전한다. “나는 황제 폐하로부터 확실한 새 소식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폐하께서 당신이 하고자 하는 선교사업에 반대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서울에 기독교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하며, 은연중에 밀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나도 당신을 위하여 선교사업을 준비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며 그 일이 잘 성취될 것입니다...”
맥클레이 목사는 이와 같이 그가 맡은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이 소식을 가우처 박사와 파울러 감독에게 보고했다. 맥클레이가 정식으로 입국하여 고종 황제로부터 선교사업에 대한 윤허를 받고 그 이듬해에 감리교의 아펜젤러, 스크랜턴 등이 한국 선교를 위해 이 땅에 오게 된 것이다.
가우처 박사는 미국 감리교의 한국 선교의 길을 터놓았으며, 1917년 배재학당 창립자 아펜젤러 기념관 기공식에 미국 감리교 감독 일행과 함께 참석하여 한국인을 사랑하여 목숨까지 주고 간 아펜젤러에 대한 애정과 한국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보여 주었다. 1922년 7월 19일 가우처 목사는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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