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진(소설가, 일리노이)

나는 좋은 차 운전하는 것에 매력을 별로 못 느낀다. 미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도, 어떻게 영어를 배울까, 어떻게 먹고 살까 는 나의 관심거리였으나, 어떤 차를 타고 어디를 달릴까 는 관심 밖이었다.
나와 공장에서 용접 일을 함께 하던 내 친구는 나와는 달랐다. 나보다 일년을 먼저 미국에 도착한 그는 처음부터 어떤 선글라스를 쓰고, 어떤 표정과 자세를 잡으며, 어느 길을 달릴까가 제일 관심사였었단다. 그는 자동차 딜러를 지나가면서 ‘저 아름다운 고급 차들 중 하나를 내가 타겠지’ 생각하면, 일주일 동안 쌓인 피로가 싹 가시곤 했었다고 고백했다. 하루는 하얀 몬테칼로를 마음 속으로 타 보고, 하루는 빨간 선더버드를 타는 상상을 하며 피로를 풀었단다.
공장이 집과 가까운 시카고 시내라, 나는 버스 타고 다녀도, 생활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내가 영어를 한두 마디 사용해 보려 할 때, 그 친구는 이미 꽤 사치스런 차를 운전하고 다녔다. 내가 공부를 해야 되나 돈을 벌어야 되나 결정도 못한 상태였지만, 그는 자동차를 사라고 나를 부추겼다. 그는 운전을 할 줄 알아야 차를 사고, 차를 몰아야 세상을 볼 수 있다고 자동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맞는 말 같기도 했다.

그는 그날 쓰는 휘발유만 채워 주면, 나에게 운전을 가르쳐 주겠다고 호의를 보였다. 언젠가는 운전을 해야 되고 배워야 될 것이니까, 기회 있을 때 숙제 하나 줄인다는 생각으로, 운전을 배우겠다고 덤벼들었다. 필기시험은 됐다. 토요일마다 두 번만 배우고, 그 다음 수요일 저녁에 시험장에 가서 시험을 보면 된다고 했다. 수요일은 저녁 9시까지 시험을 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운전 가르쳐 주러 올 때마다 거의 빈 탱크로 오기 때문에, 매번 개스를 15불어치씩 넣어 주어야 했다.
“어떤 등신은 10불씩 뇌물을 바치면서 운전면허증을 따기도 하는데, 절대 그럴 필요 없어. 운전할 줄 알고 면허증을 따야지, 모르면서 돈 먹여 따면 뭘 할 거야?”
“그렇죠. 나도 뇌물 공세는 싫어합니다.”
아내는 저녁 근무를 나가고, 나는 그 친구 차를 타고, 운전 면허 시험장으로 갔다. 시험관은 50세가 넘었을 것 같은 자상한 노인이었다. 눈보라가 치기 시작했지만, 그는 나를 위해 한번만 더 시험관 노릇을 해 주겠다고 선심을 썼다.
“미스터 정, 오늘 기분이 어떠신가? 어유, 인상도 좋으시네.”
시험관이 친절하게 구니까, 나는 기분이 좋아서 여유 있게 출발했다. 운전 코스를 돌고 주차장에 차를 세울 때, 시험관은 화를 벌컥 냈다. 친절하던 분이 별안간 화를 내니, 내가 무엇인가 크게 잘못한 것 같은데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전 영어를 잘 못하는 데요.”
“그딴 소리 할 필요가 뭐 있니? 너 합격할 거니 떨어질 거니? 돈츄 원어 패스?”
“합격하고 싶으냐고 물으셨습니까?”
시험관은 미국사람답지 않게 소리소리 지르며 화를 냈다.
“그렇다. 왜? 못 알아 듣니? 유 원어 패스 오어 낫?”
나는 ‘예스’ 와 ‘노’를 헷갈리지 않고 잘 대답하려고, 조심스럽고 정확하게 “예스” 라고 힘주어 대답했다.
“눈까지 오는데, 너를 위해……. 더러워! 재시험 치러 다시 와.”
이상했다. 영어를 잘못 알아들었나? 합격하고 싶으냐고 물은 것 같았고, “예스” 라고 분명하게 잘 대답했는데, 왜 딱지를 놓을까?

그때 나는 스스로를 꽤 괜찮은 인물인 줄로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큰 포부를 안고 도착한 미국에서, 첫 번째로 치른 시험에 낙방을 했다. 앞으로 닥칠 미국생활의 실패를 예견하는 것 같아서 눈물이 났다. 내 친구는 시험관에게 걸쭉한 미국 욕을 집어 던지며 나를 위로했다.
“괜찮아, 다음 주 또 봐. 만약 합격하길 원하느냐고 물으면, 그게 무슨 뜻이냐고 꼬투리를 꽉 잡아. ‘나는 너의 상관에게 이게 무슨 뜻인가 물어봐야 되겠다. 만약 상관이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더 높은 상관에게 쫓아가서라도 끝까지 그 뜻을 밝혀 내겠다’고 엄포를 놔. 돈 먹으려는 놈들은 버르장머릴 고쳐 놔야 돼.”
아내가 근무 끝나는 11시까지 나는 줄담배를 피우며 기다렸다. 성공을 잔뜩 꿈꾸며 당도한 희망의 나라다. 첫 시험의 낙방은 전체 미국생활 실패의 징조처럼 보였다. 실패가 이미 정해져 버린 미래를 바라본다는 것은 쓰라린 아픔이었다. 아내가 일을 마치고 출구로 나왔다.
“여보, 시험 잘 봤어요?”
말 안 하는 남편에게 차마 ‘합격했느냐’고 묻지 못하고, 시험 잘 봤느냐고 물었다.
“눈보라가 심해서 오늘은 못 본대. 다음주 수요일 저녁에 와야 된대.”
결혼하기 전, 긴 세월 사귄 여자도 아니다. 신혼생활 2개월 만에 아내가 미국으로 떠났고, 6개월 동안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살았었다. 반년만에 남편이 미국으로 뒤쫓아와 또 만나서 사는 부부다. 내 아내가 어느 정도의 실력이 있는 여자인지, 내 남편이 어느 정도의 저력을 갖춘 남자인지, 서로 잘 모르던 우리 부부였다. 떨어졌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할 때, 남자의 목소리는 떨렸을지도 모르며, 아내는 모르는 척했을는지도 모른다. 낙방은 너무 분하고 처절했다.

그 다음 토요일, 15불어치 휘발유를 넣어 주고, 다시 형식적인 운전연습을 또 했다. 시험관이 ‘너 붙기를 원하냐’고 한마디를 하면 일사천리로 공갈을 칠 영어문장들을 정리하여 차곡차곡 머릿속에 챙겨 두었다. 만약 그 상관이 내 말을 못 알아 들으면, 문장을 써 주려고, 아내 몰래 단어도 써 보고 외워 놓았다.
드디어 수요일 저녁이 왔다.
“미스터 정, 나이스 네임. 오늘 기분 괜찮지?”
“옛서.”
“한국인이지? 한국인은 호감 가는 사람들이야.”
“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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