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내영 사모(위스칸신)

이라크 전쟁을 위해 집을 떠난 아들의 소식이 끊긴 보름 동안 우리 머리 속은 암흑이었습니다. 교회 교인들을 위해서 어려움도, 몇 천리 길도 마다 않고 달려가서 함께 고통을 나누고 위로하고 가슴 아파 울었는데, 우리 아이가 떠나고보니 그 동안 우리의 감정에 작은 틈이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내 자식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외아들’이라는 의미가 더 강하고 절실하게 다가오고, 그 동안의 은혜를 감사드리면서 회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두 주가 지난 후 아들이 전화했습니다.  떠나기 전, 점검과 훈련을 받고 있으며. 신용불량자나 마약경험자, 정신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자들은 다 빼내고, 그 자리에 적격자로 채우면서 철저한 정신무장과 함께 현지적응을 위한 훈련에 임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미국 내에 있다는 것이 반가웠고 소식을 들어서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곳을 떠나기 전, 우리는 낯선 군사도로를 돌고 돌면서 달려가 두 번의 면회를 했습니다.
사담 후세인 궁에 폭격을 했다는 뉴스가 나오던 날, ‘이것은 영화가 아닙니다. 실제상황입니다’라는 자막이 나오고 전쟁이 끝날 것 같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아들이 떠나지 않고 집에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면서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 뉴스가 나온 지, 두 주가 지난 저녁, 내일 아침 이라크로 떠난다는 소식을 아들이 전했습니다.  떠나던 날 아침에 다급한 목소리의 아들을 접한 뒤, 다시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그 사이에 터키로 들어가려던 계획이 바뀌어 쿠웨이트로 들어간다는 뉴스를 접하였습니다.  아들이 터키어가 필요하다고 책을 샀는데, 이제는 새로운 말을 배우기 위해 애쓰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라크에 들어가고도 연락이 닿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E-메일로 연락이 가능해지고 우편물이 배달되기 시작하자 한결 마음이 놓였습니다.  드디어 99불에 해당하는 물건을 보내기 시작했는데, 필요한 것들을 보내라는 연락이 오면 우리는 즐겁게 물건을 사러 달려나갔습니다.  우체국에 가서 ‘선물’ 란에 표시를 하고, 만일 이 물건이 본인에게 전달되지 못하면 도로 보내달라고 표시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날이 없기를 기도했습니다.
처음에는 화장지로부터 시작해서 선블럭, 주스 가루, 샤워팩, 우표, 편지지, 인스턴트 음식 등 생각지도 못했던 물건들을 열심히 보냈습니다.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리 계속되어도 메일이 오고 있는 한 감사했습니다. 필요한 물건을 보내라는 메일이 오고 있는 한, 아들이 살아있다는 증거였으며, 받았다는 답이 올 수 있는 것은 아직 안전하다는 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는 집에서 사용하던 환자용 침대까지 보내고, 돌아올 무렵에는 집에서 즐겨입던 낡은 티셔츠와 베개까지 보냈습니다.  행여라도  생명을 오락가락하는 전쟁의 혼란 중에 마음의 이상으로 순간적인 판단이 흐려질까 염려하면서...
첫번째 사망자가 나왔을 때, 우리가 당한 것처럼 놀라고 두려웠습니다.  코트씨 해병이었는데, 아이오와 출신이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가 아이오와에 머물 때였고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는 가정의 아들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아버지가 텔레비전에 나와서 하던 말을 기억합니다. “우리 아들은 철저하게 정규훈련을 받았으므로 실종했더라도 절대로 죽지 않고 살아날 것”이라고 자신있게 한 말을... 그러나 그 해병은 결국 최초의 이라크 전사자가 되었습니다.
영화 ‘라이안 일병 구하기(Save, Privite Ryan!)’의 배경도 아이오와 가정입니다.  아이오와 주는 미국의 중심부에 있고 농업을 위주로 하고 있는데 이곳에 사는 농부 존 디어(John Deer)는 세계적인 농기구 발명가입니다.  그 이름으로 만들어진 과학적이고도 효율적인 농기구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듯 싶습니다.  전형적인 농업 위주의 지역이어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많은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 대부분이 자연스럽게 군대에 지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일들을 보고서야 우리는 미국에선 하나의 직업으로 군인을 선택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계속 많은 학생들이 날마다 죽어도 사람들은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사망자 가족들을 인터뷰하는 기자들 중에는  정말 얄미운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슬픔에 찬 가족에게서 무슨 말을 뽑아내겠다는 것인지...  놀라운 것은 미국 어머니들의 침착함이었습니다.  슬퍼하기보다 그의 행적을 추모하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정말 강한 어머니들로 느껴졌습니다.  날마다 죽어가는 젊은이들로 내 눈은 마를 새가 없었습니다.  미국 국가가 텔레비전에서 나오면 크게 틀어놓고 줄줄 울었습니다.  하나님 이 젊은이들을 살려서 돌려보내 주시옵소서.
13개월의 약속된 기간을 보내는 동안 우리는 기도 부탁한 사람들에게조차  아무 말 못하고 파묻힌 듯 살았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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