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롭게 설교를 듣고 있던 한 남자가 마음에 감동을 받아 벌떡 일어서더니 울먹이며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여러분! 저는 비열하고 악한 죄인이었습니다. 이제야 그걸 깨달았습니다”그러자 옆에 가만히 앉아있던 아내가 그를 끌어당기며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여보! 앉으세요. 당신이 죄인인 것을 여기있는 사람은 다 알고 있었어요”

우리는 언제부터 죄인이었을까요? 우리의 영혼은 그 죄에 의해 어디까지 전이되었을까요? 다윗은 그의 시에서 자신이 모태로부터 죄중에 태어났다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영혼 속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노래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울에 비추어진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도다”고 탄식했습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과 교육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며 자신이 선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는 죄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데서 생겨난 오해입니다. 죄는 사람들 앞에서는 그 노예를 숨겨주거나 미화시키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감각을 무디게 만들어 죄책을 느끼지 못하도록 만들기도 하지요.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곤 합니다. 

죄가 자신의 존재와 능력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순간은 홀로 있을 때입니다. 어떤 실험에서 사람들이 화장실을 사용하고 난 후 손을 씻는 정도를 조사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있을 때와는 달리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는 세 명 중 두 명이 손을 씻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의 행동이 누가 보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말해주는 이야기 같습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연예인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바른생활 사나이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지요. 하지만 그 말은 완전히 틀린 말이라고도 했습니다. 자신은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지은 죄를 잘 숨기며 사는 사람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정직한 고백입니다. 우리는 신분에 상관없이, 외모에 상관없이 본질상 죄의 사람들입니다. 다만 그것을 문제삼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버티며 살고 있을 뿐입니다.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의 오해의 기간 만큼 형집행을 유예받으며 살고 있을 뿐입니다. 사역자라 해서, 헌신자라 해서 이 진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은혜 아래서만 의로운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늘 깨어있으라는 말씀은 죄와 관련하여 우리가 본질상 죄인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선을 향한 당신의 의지를 과신하지 마십시오. 타인을 포함하여 여러분 자신도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부디 홀로 있을 때를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긴장하십시오. 고독한 순간에 찾아오는 생각의 색깔을 잘 구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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