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근 목사 (미주성결대 명예총장)

해방의 신학(theology of liberation)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1960년대에 남아메리카에서부터 불어온 신학의 폭풍이었습니다. 이 해방신학이 한국에 상륙해서는 민중신학이 되었고 미국에 불어 와서는 각각 흑인신학과 여성신학이 되었습니다.
해방신학은 글자 그대로 해방을 목적으로 합니다. 가난뱅이들을 가난에서 해방시키고, 억눌린 자들의 짐을 가볍게 하고, 갇힌 자들을 풀어 놓아 다니게 하려는 것이 해방신학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해방신학은 “억눌린 자에 의한, 억눌린 자를 위한, 억눌린 자들의 신학”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신학은 마르크스적 공산주의와 기독교 신학의 결혼이라는 측면이 있습니다. 노동자에 의한, 노동자를 위한, 노동자의 정부를 세운다는 것이 공산주의의 찬란한 명분이니까요.
그렇다고 해방의 신학이 전혀 나쁘기만 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을 얽어매는 여러 가지 굴레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은 기독교의 구원사상의 핵심입니다. 그것은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목회사명 선언에서 명백하게 나타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눅4:18,19).
전통적 기독교에서는 이 말씀을 죄와 악령의 쇠사슬에서 인간의 영혼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방의 신학에서는 그것을 사회경제적 족쇄에서 인간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강조점의 차이가 매우 커 보입니다.
그러나 해방신학이 고난과 비판을 받게 된 데는 사상이 달라서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는 폭력적 혁명을 옹호한 데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성전을 성결하게 하실 때에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사용하셨다는 데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1970년대에 한국에서는 군사정권 반대투쟁가들이 이 해방신학을 무기로 삼았습니다. 북조선 동조세력이라는 오해를 없애기 위하여 이름을 민중신학으로 바꾸었습니다. 민중신학과 해방신학은 전혀 다르다는 주장을 펴는 학자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힘을 잃게 되니 민중신학도 김이 푹 빠지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해방의 신학이 흑인신학으로 색깔을 바꾸었습니다. 킹 목사 등이 주도한 흑인민권운동의 신학적 기초가 된 이 흑인신학은 모든 흑인적인 것은 선이고 모든 백인적인 것은 악이라는 오해를 낳을 만큼 과격한 신학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흑인만을 위한 해방자로 오셨다고 주장할 정도였습니다.
여성이 억눌린 존재이므로 해방의 신학이 여성신학 형성에 큰 실마리를 제공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여성신학 주창자들 가운데도 과격한 부류가 없는 것은 아니나 여성신학자들은 대체로 성경해석에 있어서 남성중심의 오염을 벗겨내는 작업에 관심을 쏟았습니다.
그런데 2009년도는 해방의 신학이 끝나는 해로 역사에 기록될 것 같습니다. 흑인으로 분류되는 오바마의 미국 대통령 당선으로 흑인신학은 그 사명을 다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여성신학도 덩달아 사라질 것입니다. 흑인이나 여성은 더 이상 억눌린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백인신학과 남성신학의 원년이 될 것도 같습니다. 백인들이나 남성들이 억눌린 자들의 신세로 전락될까 우려됩니다. 쓸데 없는 걱정이기를 바랍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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