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하면서 본다는 한국의 한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자신을 구박하고 죽이려 했던 남편과 그 가정에 복수하기 위해 신분을 숨기고 다시 그 집에 들어가 사는 여인을 다루고 있습니다. 억지설정과 비윤리적 내용이 들어있지만 시청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하는군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억울함과 분노에 대한 대리만족효과라고도 합니다.
 그 말이 맞다면 속으로 복수하고픈 마음을 갖고 사는 사람이 한국사회에 많은 모양입니다. 차마 현실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후련함을 느끼고 싶어하는 것이라는데 연민을 느낍니다. 분명 복수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많은 사회라면 이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정의와 진실이 왜곡되고 약자에 대한 법의 보호와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니까요. 

나를 괴롭힌 사람이 같은 하늘아래에서 그것도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잘 살고 있다면 이를 편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몇이 안될 것입니다. 게다가 그 과거와 상처때문에 자신은 여전히 비참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인내도 잠시뿐 계속하여 견디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성경은 말했지만 그 악인이 내 고난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면 이는 부러움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의 문제가 될 것입니다.
분노와 원한이야말로 사랑과 마찬가지로 죽음같이 강한 힘입니다. 복수심을 가지고 사는 이들에게는 복수의 대상과 시기가 유일한 삶의 목표일 수 있습니다. 내가 당한 것 만큼 상대도 당하게 되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송두리채 빼앗을 날을 생각하며 와신상담을 견뎌내겠지요. 죽이고 싶도록 미운 그 상대를 파멸시키는 날이 그에게는 기쁨의 날일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것으로 끝일까요?

문제는 이러한 복수는 악순환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칼은 칼을 부릅니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부르지요. 원한을 갚는 과정에서 또 다른 사람이 한을 맺게 되고 복수하는 사람 역시 도덕적, 영적으로 죄를 짖습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아줄 수는 있지만 이는 또 다른 원한관계의 시작일 뿐입니다. 게다가 악인을 형벌적 수단을 통해 당한 것 만큼 갚아주면 그는 더 이상 그런 일을 하지 않을까요? 그럴수도 있지만 혹 댓가를 치뤘다는 마음의 자유만 줄 뿐 삶은 그대로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용서라는 말이 어떤 이에는 당장 와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죽이고 싶도록 억울하고 분한데 용서라니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복수가 진정한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악인의 변화는 더더욱.
그러면 당신을 그렇게 힘들게 한 사람을 어떻게 하냐구요? 그것은.. 그것은 말입니다. 미안하지만 그것은 당신의 몫이 아닙니다. 그 몫은 의로우신 재판장 하나님의 몫이고 그 분이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어떻게 알아서 하실까요?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진실하셔서 죄를 싫어하시고 악을 반드시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의로운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죄를 멸하는 분이십니다.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당신을 힘들게 한 사람에 대한 집착으로 당신 인생을 망치는 것은 더 큰 비극입니다. 진정한 복수는 그 원한의 사슬에서 벗어나 당신이 그 사람보다 더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용서는 그것을 가능케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용서야말로 가장 위대한 복수입니다.  물론 이 말은 복수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 하는 말일 뿐 악을 행한 자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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