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성환 목사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통화가 안 되면 대부분은 회신을 기다립니다. 내 번호가 상대방의 전화기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답이 없는 경우엔 상대방의 예의를 의심합니다. 날 뭘로 보는 거야라는 생각으로 발전한다면 마음이 상당히 불편해졌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아쉽다면 다시 연락을 하여 음성녹음을 하거나 방법을 바꾸어 문자를 보내기도 합니다.

문자에도 답이 없어 메시지를 녹음한 적이 있습니다. 메시지에도 답이 없어 마음이 더 불편해졌지만 감정을 순화시키고 이메일로 소식을 전했습니다. 드디어 답장이 왔습니다. 얼마 전 전화기를 바꾸어 그런 일이 생겼다고. 미처 알려 드리지 못해 미안했다는 인사말도 덧붙였습니다. 사실 전화번호 바뀌었다고 내게 꼭 알려 주어야 할 정도의 관계도 아니었기에 그의 잘못이라 할 수도 없었습니다. 누구의 책임이라기보다 상황이 겹치면서 만들어진, 일어날 수 있는 해프닝이며 오해의 사건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오해가 어떤 경우에는 평생 원수를 만들기도 하고 그 반대의 관계를 만들기도 합니다. 이해보다 오해의 사건에서 시작되는 역사가 의외로 많습니다. 오해로 인해 시작되는 사랑도 있습니다. 상대방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친절로, 조금 정도가 세기는 했지만 연인의 감정으로 한 것은 아니었는데 받아들이는 사람이 착각하여 특별한 마음을 품기도 합니다. 해석의 차이가 있음을 알아채는 순간 그나마 있던 정까지 떨어지며 남남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 전에 없던 감정까지 생겨나 불타는 사랑으로 발전하기도 하지요. 어쩜 이미 결혼한 커플중에는 이런 착각이 계기가 되어 맺어진 관계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헌신적 행동은 오해에서 비롯되기도 합니다.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혼자만의 생각으로 깊은 헌신을 하는 사람들, 어쩜 그의 헌신의 시작은 모두 오해와 착각일 수 있습니다. 골리앗 앞에 나선 다윗도 뭘 잘못 알아서 나선 게 분명합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르듯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비록 오해에서 비롯된 헌신이었지만 이것이 선을 만드는 시작점이 된다는 점입니다. 그 여부를 결정하는 이는 누구일까요? 분명한 것은 그 사람 자신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렇듯 어떤 오해는 둘의 관계를 사랑으로 발전시키도 합니다. 어떤 오해는 그 동안의 관계를 하루 아침에 깨트리기도 합니다. 어떻게 되는가는 오해에 대한 반응에 따라 달라집니다. 내 행동에 대한 상대의 오해, 오해한 상대의 반응에 대한 내 태도가 인생과 역사의 향방을 결정하는 것이 아닐까요?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사건은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합니다. 그 선과 악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시 선이 악이 되기도 하고 악이 다시 선이 되기도 하지요.

오늘도 우리는 수많은 착각과 오해 속에서 삽니다. 오해가 있었다면 풀어야 하겠지요. 무릎을 마주 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서로 듣는 시간을 가져 보면 좋을 것입니다. 또 하나의 방법은 그 오해를 어떻게든 좋은 쪽으로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실수로라도 시작되는 사랑, 오해로라도 드려지는 헌신, 착각으로라도 피어나는 꽃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에 보이지 않는 손길이 필요합니다. 잘못된 해석들까지도 이해로 바꿔 주시고, 덮어 주시고, 선으로 바꾸어 주실 그분의 은혜를 갈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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