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성환 목사

먹고 살 일이 막막하고 도와주려는 이보다 앗아가려는 이들이 주변에 더 많을 때 연약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어디로 피하거나 전혀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릴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최후의 피난처는 죽음입니다. 대부분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가지만, 현재가 죽기보다 힘들다는 생각이 들면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거나 두려운 이들은 대신 기다림을 선택합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린다면 그 누군가는 현재 자신의 주변에 있는 이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존재일 것입니다. 제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겠지요. 그는 모든 소망의 종합이며 완벽이며 이상입니다. 그런 분은 생각 너머의 세계에 존재합니다. 그분은 미래의 시간으로부터 오십니다. 적어도 내가 이미 경험했거나 지금 경험하고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입니다. 말로 설명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생각과 언어로 제한된 존재가 됩니다. 설명할 수 있는 존재는 그 자체로 불완전한 존재임을 드러내기에 온전한 기다림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도 그를 표현한다면 “형용할 수 없는 분”이라고 할 것입니다.

기다림은 고통이지만 동시에 설레임입니다. 행복입니다. 꿈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이라지요. 언제나 미래에 있고, 상상의 세계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세계를 위해 한 걸음 나아가면 그 미래는 자신의 매력을 지키기 위해 또 한 걸음 뒤로 물러납니다. 어떻게든 실현하면 또 다른 모습으로 상상의 세계 속에 머물지요. 그래서 우리는 끝없이 나아가고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사는 것은 끝없는 갈망을 가지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갈망은 집중력과 헌신을 불러일으키지만 결국은 목마름 속에 죽게 만들지요.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들어 죽음에 이르게 할 뿐입니다. 달콤하다는 착각까지 하게 만들면서요. 그것이 과연 참된 행복일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다림의 대상입니다. 그분은 상상 그 이상의 분이며 온전함의 온전함이지요. 그러나 우리에게 영원한 기다림이 되실 수 있는 그분은 기다림을 미래의 세계 속에 두지 않고 현재의 세계로 가져오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성소입니다. 성육신입니다. 예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전히 기다립니다. 기다림을 예배하며 삽니다. 심지어 기다림의 대상을 인위적으로 만들거나 현재를 떠나 미래의 거리를 헤맵니다. 기다리는 대상을 만나고자 하는 열정으로 현재라는 대지를 생각없이 버립니다. 바탕이 없이 미래라는 공중을 헤매는 열정이 과연 행복을 보장할 수 있을까요? 찾는 순간 실망하며 또 다른 기다림을 찾아 떠나는 것이 과연 의미있는 도전일까요 열정일까요?

성육신의 사건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더 이상 기다리거나 기다림을 정복하기 위하여 찾아 헤매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이제 누림입니다. 왜냐하면 기다림의 대상이 미래에 있지 않고 현재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적극적으로 찾아 헤매고 계십니까? 사랑은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미래에도 있지 않습니다. 사랑은 바로 당신 안에 있습니다. 기다림을 멈추십시오. 기다림을 찾아 나서지 마십시오. 방황이 될 것입니다. 대신 기다림을 누리십시오. 당신이 이미 경험한 세계 속에, 지금 당신이 경험하고 있는 시간 속에 당신이 그렇게나 기다리고 있던 사랑과 행복이 와있습니다.

빛이 왔으나 사람들은 영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랑이 이미 왔으나 당신은 여전히 굶주리고 있지는 않은가요? 행복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당신 옆에 그리고 당신 안에 있습니다. 당신에게 이미 주어진 것들과 사람들에게로 마음의 눈을 돌리십시오. 채워질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채워진 행복을 인정하고 감사하십시오. 만약 우리가 기다린다면 바로 그 진실에 눈을 뜨는 은혜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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