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근 목사 (유니온교회 원로목사, 서울신학대학교 교환교수)

미국의 어떤 성인학교에서 여름학기에 말하기와 듣기 훈련을 위한 과목을 개설했습니다. 그런데 말하기 과목에는 수강자들이 몰려들어 더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듣기 과목은 파리만 날리게 되었습니다. 단 두 사람만 지원을 했기 때문에 폐강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얻은 결론이 있었습니다. 말하기에는 훈련이 필요하지만 듣는 것은 저절로 된다는 편견이 심하다는 뜻입니다. 
  “혹시, 말하기에는 관심이 많지만 듣기에는 흥미가 거의 없다는 것 아닐까요?”
그런 설명을 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점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어떤 목사와 점심 만남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저보다 칠 년 정도나 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시간 반 내내 그의 이야기만 듣고 왔습니다.

  자기가 신학대학원 학생일 때 나는 전임강사였지만 집사여서 학생들이 좀 우습게  보았다는 이야기, 그래서 평신도는 이등인간이냐고 거세게 항의한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 지난 삼십 년 동안 사역해 왔던 성공담과 실패담, 한국의 큰 교회 목사들의 비리들, 정치가들의 더러운 뒷이야기, 자본주의가 가난한 자들의 폭력이 되고 있다는 분노... 어떤 때는 그 자신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을 쏟아놓고 있었습니다.

  말하기라면 저도 어지간히 즐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참여하는 뜻으로 중간 중간 질문도 하고 의견도 개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말참견조차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한 시간 반을 고문만 당하다가 간신히 풀려나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점심값은 제가 냈습니다. 얼마 되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유익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헤어졌지만 속은 여전히 아렸습니다. 대화에서 다섯은 듣고 둘은 말하라는 것이 저의 평소 소신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오해하기는 쉽고 이해하기는 그만큼 어렵기 때문입니다. 5대 2의 비율은 오해와 이해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신까지 무참하게 깨어진 대화, 아니 독백이었습니다.

  그래도 위로가 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늙어 가면 늙는 만큼 말이 길어지게 마련인데 듣는 훈련을 억지로라도 하게 되었으니까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라”(약 1:19).
  그리고 이 말씀도 실천에 옮길 수 있었기에 기분이 상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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