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성환 목사(온누리교회)

이청준 님의 소설 ‘축제’에는 부모의 죽음 앞에서 모든 자식은 다 죄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상여를 따라가는 상주들의 지팡이가 짧은 이유는 감히 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로 지은 죄들이 많기 때문이라 하는군요. 내 존재의 근원이고 일방적으로 내 편을 들어 주는 유일한 분들인데도 그분들에 대한 우리의 행동은 마음 같지 않습니다. 남의 부모나 동네 어르신들에게는 깍듯이 예를 갖추면서도 정작 내 부모에게는 왜 그리도 퉁명스러워지는지요.

후회와 죄책감도 감상적인 차원에만 머물 때가 많습니다. 어버이 날이나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옛노래를 들을 때에는 자신을 탓하며 효도를 결심해 보지만, 그렇다고 찾아뵙는 횟수가 늘거나 보내드리는 용돈을 더 늘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습관적인 탄식을 하다가 타성에 젖은 각오를 할 뿐입니다. 어느 날 그 분들을 하늘로 돌려보내는 날이 오겠지요. 혹시나 그 순간이 오면 회한과 슬픔의 눈물을 며칠간 쏟아내고는 그것으로 모든 죄책감을 씻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자식들 앞에서 부모 또한 죄인이 됩니다. 좋은 부모가 되기를 소망했지만 제 성질에 못이겨, 형편이 어려워, 또는 미성숙하여 제대로 표현 못한 사랑이 참 많습니다. 그들의 얼굴에서 해맑은 미소와 천진난만한 표정을 빼앗은 것은 가난도 질병도 아닌 비인격적인 양육방식이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 앞에서 서로 다투어 눈치를 보게 만들고 알지 못해 저지르는 자그마한 실수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여 불안감을 심어 주는 것도 다른 이가 아닌 부모들입니다.

교육학, 상담학, 아동심리학에 대한 상식적인 지식이 없는 것도 아닌데 막상 현실에 부딛히면 나를 움직이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분노나 상처의 감정들입니다. 알게 모르게 그들의 가슴 속에 생채기를 내어놓고는 내가 자랄 때는 어떠했다는 말로 자신의 부족을 덮으려 합니다. 훗날 그들의 인격과 삶에 어떤 문제라도 발생한다면 모두 내 탓인 듯 느껴질 텐데 그 느낌을 어찌 감당할지 생각만 해도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또 있습니다. 언제나 죄인이 되는 자리가. 바로 하나님 앞입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에 늘 그분을 갈망하며 살지만, 조금만 편해지면 마음 속에서 가장 먼저 지우는 분이 바로 그분입니다. 선을 따라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악을 추구하는 본성 역시 그에 못지 않기에 우리의 선택과 행동은 어둠에 보다 더 가깝습니다. 실패와 후회의 되풀이 속에서 우리의 영혼이 얼마나 곤고해지는지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기는 그저 시인의 노래로만 가능한 일인가봅니다. 어떤 분야에선 업적을 이루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 하지만 모든 면에 온전하다고 인정받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에게도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능하시고 완전하신 그분 앞에만 서면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고 겸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은 참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 순간에 숨을 곳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자식임을 숨기고 부모임을 숨기고 피조물임을 숨기고 싶습니다. 내가 곧 내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고통을 느끼는 그 자리가 내 안에 평화가 시작될 수 있는 자리입니다. 한계를 깨닫는 순간이 은혜가 임할 수 있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식의 자리, 부모의 자리 그리고 피조물의 자리를 부정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죄인이지만 죄인일 수밖에 없는 자신을 인정하며 그곳에 서 계십시오. 그 고통의 마지막 순간에 임하는 특별한 은혜를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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