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성환 목사(온누리교회)

신문은 연일 일본에서 발생한 대형 재난에 대한 취재기사와 분석기사를 내놓고 있습니다.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눈 앞에 펼쳐지자 모두들 입을 다물지 못하는 듯합니다. 선진국이라 불리우고 안전에 대해서 비교적 신뢰할 만한 시스템을 가진 나라였기에 충격은 훨씬 더 크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생각은 자연스럽게 자신에게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괜찮을까?’

남 얘기로만 들리지 않는 것은 지리적으로 아주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이번 사태가 우리가 가지고 있던 어떤 것에 대한 신뢰감을 한순간에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각자는 나름대로의 신념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 속에서 안전함을 누리며 삽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제는 더 이상 믿을 게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하거나 살겠다고 몸부림치는 모습, 힘없이 주저앉아 운명의 순간을 맞이하는 모습, 공포나 원망을 토하며 절규하는 모습, 단지 본능에 이끌려 닥치는 대로 행동하는 모습 등 죽음 앞에서 보이는 인간 군상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하지만 누가 누구를 판단하겠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진정 인간적인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감당할 수 없는 재앙, 이는 집단적으로뿐 아니라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언제든 발생할 수 있습니다. 갑작스런 권고 사직, 치료 불능의 질병, 절대적 존재감을 가진 이와의 이별 등. 나름대로 그 속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신심을 가진 이들은 그 순간 절대자에게 기도하겠지요. 살려달라고, 자신만은 예외가 되게 해달라고.

하지만 어떤 경우에 절대자는 절규하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으십니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해결책은 더더욱. 또 한번의 절망에 빠져드는 순간입니다.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들면 의존감이 분노의 감정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마음이 무너질 수 있고 생명줄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잘 생각해 보면 절대자가 우리에게 남겨준 것이 딱 하나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약속입니다. 약속에는 현재성이 없습니다. 약속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건도 아니고 눈으로 확인 가능한 어떤 실재도 아닙니다. 단지 어떻게 해주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것도 지금이 아니라 미래의 어느 시점에. 어떤 약속은 고난중이 아니라 고난이 끝난 후의 상황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서글픈 일입니다. 실재하지 않는 미래를 기대하며 거기에 모든 것을 걸어야만 하니까요. 하지만 모든 인간은 그 것밖에 의지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를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밖에는 기댈 곳이 아무 것도 없다면. 그것에라도 마음을 두고 지금의 불안을 이겨야만 한다면...

어찌 보면 약속만을 의지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이기적인 유전자에 의해 만들어진 최후의 도피수단이요 환상일지도 모릅니다. 실증주의적이고 경험주의적인 사고로만 사는 사람들에게는 무의미하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약속이 막다른 상황에서 내가 만든 문구나 환상이 아니라 절대타자로부터 내게 주어진 것이라면 의미는 달라집니다. 그 약속에 모든 것을 걸고 믿음을 두어야 할 이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지금은 재난을 피할 방재복이나 피난 방법을 찾을 단계가 이미 지났는지도 모릅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그때가 온 것이라면 그냥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죽음이라 할지라도.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에 관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끝난 그 다음에 관한 것입니다. 그에 관한 약속을 들으신 것이 있습니까? 만약 그런 약속을 주셨다면 거기에 모든 것을 걸으십시오. 이제 더 이상 기댈 것은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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