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성환 목사(온누리교회)

“왜 하나님은 모세의 무덤조차 남기지 않게 하셨을까?”
신명기를 읽으면서 문득 든 생각입니다. 여호수아에게는 상관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지도자요 영적으로 선지자였던 그는 40년 동안 온갖 고된 일들을 겪으면서도 온유함과 불굴의 의지를 잃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결국 그는 이스라엘을 가나안 바로 앞까지 인도하는 데 성공하지요.

하지만 그의 몫은 거기까지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해방과 조직화에 엄청난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도 소망했던 가나안땅을 한 발자욱도 밟지 못하고 느보산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의 죽음은 30일 동안의 애도 기간을 가질 만큼 범공동체적 사건이었읍니다. 그렇지만 그의 무덤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그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의 명성과는 너무 안 어울리는 결론입니다.

거꾸로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그의 무덤이 남아 있다면 어찌 되었을까? 아마도 사람들은 그곳을 잘 보존하고 꾸며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도록 만들었겠지요? 지금도 요르단의 느보산에 가면 모세기념교회가 있고 교회 앞에는 대형 놋뱀 조형물이 우뚝 서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찾으며 그의 위대함과 업적에 칭찬과 감탄사를 아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성지라 부르면서 영토 분쟁때마다 쟁탈전을 벌이는 공간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혹시 바로 그 점 때문에 무덤조차 남기지 않은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사람들이 모세가 율법을 지켰던 것처럼 살기를 원하십니다. 모세는 그들의 역할 모델이며 존경의 대상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모세의 무덤이 그들의 영적 세계와 마음의 중심을 빼앗는 것도 원치 않으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이 되는 것은 더더욱.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모든 대상은 은혜의 통로가 될 수도 있지만 우상도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도피처가 될 뿐 꿈을 향한 출발지가 될 수 없습니다. 우상은 매이게 할 뿐 자유케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원치 않으셨기에 이 땅에 자신의 몸을 남기지 않으시고 아예 부활하신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뭔가를 남기려 합니다. 그리고 남은 자들은 그것이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어떤 것이기를 원합니다. 눈으로 기억하는 것이 마음으로 기억하는 것보다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기념품화하고 성지라는 이름으로 유적지화합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더 가깝습니다. 만약 남긴다면 유품이 아니라 유언이요, 유물이 아니라 유지입니다. 그냥 주어진 시대에 충실하고 시대적 사명을 다한 것으로 만족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만약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누군가를 지배하겠다는 욕심에서 뭔가를 남기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하는 잘못된 영성입니다. 그로 인해 생기는 다양한 문제들을 우리는 교회에서, 정계에서 그리고 역사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합니다.

스스로 남기려 하지 마십시오.  그냥 주어진 오늘에 최선을 다해 사는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먼저 간 이를 기념하고 추모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추모의 마음이 우상 숭배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숭배받을 그 대상이 미워서가 아닙니다.

기념이 아니라 숭배가 될 때 그 속에 당신의 정신이 갇히고 영혼이 얽매이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상태에서도 뜨겁게 사랑할 수 있고 동일한 마음을 지킬 수 있다면 최선입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의 태도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영감을 얻고 모세의 흔적이 아니라 모세의 하나님에게서 위로를 얻는 것이 더 성경적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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