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성환 목사(온누리교회)

배우들은 작가가 쓴 대본에 감정과 혼을 불어넣어 작품을 살아있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작품은 해석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지요. 지휘자의 해석능력, 배우의 표현능력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해석에는 원저자가 기록해 놓은 의도나 표현만큼이나 해석당사자의 경험도 영향을 미칩니다. 여기에 다른 이들의 감정과 해석 당시의 분위기도 작용합니다. 그래서 작가들은 대사의 앞에 지문이라는 것을 적어넣습니다. 어떤 작가는 직접 배우들의 연기를 지도하기도 합니다. 임의적인 해석을 막고 감정과 동작을 표현하기 위해서이지요. 만약 그런 지문이 없다면 그 몫은 배우의 것이 될 것입니다. 배우가 어떻게 해석하여 표현하느냐에 따라 드라마의 공감도는 많이 달라지겠지요?

성경은 예수의 마지막 모습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가 숨이 멎기 전에 던진 일곱 가지 말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는 어떤 감정으로 이 말을 했을까요?
버림받았다는 생각은 표현되어 있지만 그의 감정을 알아챌 수 있는 지문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지칠대로 지쳐 있는 상황에서 숨이 멎을 지경에 이르러 내뱉은 말이니 아마 목소리는 크지 않았을 것입니다. 얼굴은 피범벅이었기에 표정을 읽기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수많은 감독들이 이 장면을 해석했고 내로라 하는 배우들이 이를 연기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연출자요 배우라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작가라면 어떤 지문을 넣으실 건가요?

(원망의 목소리로 절규하듯)이라고 적을 수 있습니다. 이때의 감정은 분노이겠지요. ‘어떻게 나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 당신은 나의 아버지가 아니냐 그런데 어떻게 나를 버릴 수가 있느냐’고 말입니다. 예수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순종을 선택했고 상대는 절대권력의 소유자이기에 원망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 게다가 이를 표현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예수의 모습이 그리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극한의 억압 속에서 순종과 침묵의 삶을 살아왔는데 단 한번 그렇게라도 쏟아내지 못했더라면 너무 억울하니까요. 그러한 순간마저 허락되지 않았다면 예수는 아마도 피흘려서가 아니라 답답해서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내성적인데다가 늘 착한 모습만 보이며 살아온 사람이라면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저항적인 한 마디는 속이라도 후련하게 하는 위로제가 될 것입니다.

(체념하며 숨이 넘어가는 듯한 목소리로)일 수도 있습니다. 슬픔과 체념의 감정이 가득한 모습입니다. 한을 삼키듯이라고 표현하면 맞을까요. 거절하고 싶지만 거절할 수 없는 연약한 자였기에 마지막 순간까지 하소연하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는 처량하고도 슬픈 눈빛으로 하늘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흐느끼며 “내게 왜 이러셨어요”라고 탄식하겠지요. “내가 이렇게도 잘못했나요”라는 말까지 한다면 더 공감이 가겠지요. 이런 모습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의 모습과 일치하는 장면일 수 있습니다. 이 소리는 속이 시원하다는 느낌보다는 너무 딱하다는 생각을 갖게 하겠지요. 그래서 함께 울게 되겠지요. 울다보면 눈물로 고통이 씻겨지겠지요.

어느 것이어도 좋습니다. 어떻게 말하더라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은 상대방이 여전히 침묵했고 죽음으로의 시계는 되돌려지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래도 의미는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거절이 아니라 용인이니까요. 중요한 것은 그렇게라도 ‘말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그가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예수가 우리를 대신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라도 말하고 싶은 게 우리니까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무엇이라도 하고픈 게 인간이니까요. 끝까지 침묵하기에는 고통과 생각이 너무 많은 인간이니까요. 인간에겐 감정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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