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성환 목사(온누리교회)

사람들은 나를 압니다. 그러나 그런 나를 나는 모르며 삽니다. 나는 나를 잘 압니다. 하지만 그런 나를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나와 사람들은 ‘나’에 대해 알거나 모르는 부분이 서로 다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갈등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와 사람들이 여전히 만나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서로 다르게 아는 부분에 대해 서로 알려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분적인 앎에서 온전한 앎으로의 변화를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을 알려 주고 싶어합니다. 사람들이 결과에 대해 주목할 때 나는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싶은 충동을 더 강하게 느낍니다. 현재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게 과거를 자꾸 말하려는 것이 때로는 시간 빼앗기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더욱이 현실이 비참할 경우에는 과정설명은 변명처럼 들립니다. 반대로 현재가 영광스러울 경우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힘든 과정을 설명하면 마치 자기 자랑처럼 들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현재와 더불어 과정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오늘은 어제의 연장선임을, 그리고 현재의 영광은 공짜가 아니라 치열한 대가를 치른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부분적인 앎은 불완전한 지식과 편중된 가치관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알려 주고 알아가는 과정이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모르던 부분을 알아야겠다는 의지보다는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부정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더 크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힘들었는가에 대해 듣다가 이제 막 꿈틀대는 의욕이 식어버릴까 염려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두려움은 때로 의지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니까요. 하지만 시기의 문제일 뿐 알아야 하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교만함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타인을 부정함으로 자신을 긍정하려고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만함이 겸손을 짓누르는 경우입니다. 이런 현상은 내면이 공허한 사람에게서 더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무시함으로 우월함을, 판단함으로 정당성을 내세우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또한 자신만의 생각일 뿐입니다. 알지 않아도 될 만큼 지혜로운 이는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앎은 빼기가 아니라 더하기입니다. 나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다른 지식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평면적인 관찰에서 입체적인 관찰로, 단편적인 지식에서 종합적인 지식으로 자신과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경지에 오를 때까지는 당당하면서도 겸손해야 합니다. 당당함이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빼지 않아도 된다는 자기 확신이요, 겸손함이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지식에 또 다른 것을 더해야 한다는 필요의 인식입니다.

성경은 아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은 끝이 없습니다. 비록 잘못된 것을 알고 있었다 할지라도 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까지 알아온 것도 긍정하고 새롭게 알아가야 할 것도 긍정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잘못 알아온 것이 있다면 앞으로 알아갈 것들 속에 녹아들고 새롭게 해석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알기를 힘써야 합니다. 힘써서 알아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이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내가 있고 우리가 있고 세상이 있습니다.
과정이 있고 드러나지 않은 것이 있고 말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알게 될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깊은 사람, 넓은 사람, 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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