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근 목사 (유니온교회 원로목사, 서울신학대학교 교환교수)

유니온교회가 개척의 문을 연지 두 달쯤 되었을 때 할머니 한 분이 등록신자가 되었습니다. 한매 권사입니다. 걸음걸이가 불편해서 지팡이를 짚고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바로 한국교회사에 별처럼 반짝이는 인물 김교신 선생 부인되는 분입니다.
  김교신 선생이라면 우리는 <성서조선>이라는 신앙잡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분이 발행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식민지시대에 그 구독자들까지 투옥시킨 명망 있는 애국적 신앙잡지입니다. 김교신 선생은 비록 무교회주의를 표방했지만 실상 일본 성결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 아내 되시는 분이 성결교단에 속한 우리 교회 등록신자가 되었습니다. 83세였습니다.
  한매 권사는 이효신 권사의 안내로 유니온교회에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이효신 권사의 남편 되는 양인성 교장(용산고)도 김교신 선생과 함께 <성서조선> 운동에 적극 참여했기에 서로 오랜 친분이 있었습니다. 그 두 분은 마치 예루살렘 성전의 두 기둥 야긴과 보아스처럼 유니온교회를 위하여 하나님이 보내주신 기도의 버팀목이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목사님께서 ‘지남철 목사’ 되라고 기도합네다. 유니온교회 오는 신자마다 딴 데로 가지 않고 목사님께 쩔꺽쩔꺽 들러붙는 지남철 말입네다.”
  한매 권사는 아주 진지한 태도로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아이구, 권사님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앞으로는 남자만 늘러 붙도록 해 주세요. 여자는 곤란해요.”
그 말 듣고 함박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이민교회에는 방문신자는 많은데 선만 보고 가서는 그만인 사람들이 많으니까 답답해서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 아무튼 교회와 목사를 그토록 사랑하는 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어떻게 하면 죽어가는 저 영혼을 하나라도 더 끌어당기는 지남철 목사가 될까 고민도 많이 하고 연구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유니온교회 한 번이라도 다녀간 방문신자라도 유니온교회 회원이라는 계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은 그 가정을 심방했던 적이 있습니다. 유명한 함경도 가자미식혜가 포함된 사랑의 점심을 대접받았습니다.
   “목사님, 이제 신자들 이름을 다 못 외우니 어쩌지요? 1백 명 넘으니까 자꾸 잊어버려요.”
“그럼 권사님 이제까지는 다 외우셨어요?”
  저는 놀라서 여쭈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방문을 열면서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침대 맞은 편 벽에 큼직한 글씨로 유니온 가족들의 이름이 아이들까지 모두 적혀 있었습니다. 안경을 안 써도 볼 수 있을 만큼 큰 글자입니다. 잠들기 전마다 그 가족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간절히 기도해 왔다는 간증을 했습니다.
  “노인들은 시간도 많고 잠도 잘 안 오니 유니온 식구들 위하여 간절히 기도해 달라는 목사님  말씀 듣고 그대로 해 왔지요.”
  그런데 이제 신도 수가 1백 명을 넘어가니 이름 외우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분께서 유니온교회에서 9년 가까이 주님을 섬기다가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숨을 거두는 그 날까지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남편 김교신 선생처럼 단정하게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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