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성환 목사(온누리교회)

몇일 전 비만 다람쥐라는 제목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캘리포니아의 한 공원에서 찍힌 다람쥐의 모습은 보기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도토리를 두 앞발로 들고 서서 입을 오물거리는 민첩하고 날씬한 모습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보통 다람쥐의 두 배도 넘는 뚱보체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카메라 앵글이 한번에 담기조차 버거울 정도였습니다. 관찰자의 말을 빌리면 관광객이 준 먹이만을 받아먹다가 그렇게 되었답니다.

언젠가 시민들이 준 먹이만 먹다가 살이 너무 쪄서 뒤뚱뒤뚱 걷기만 하는 비둘기에 대한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닭과 같다며 닭둘기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들은 참 편해 보입니다. 먹이 때문에 고생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이 과연 그들에게 좋기만한 일일까요? 날지 못하는 비둘기, 달리지 못하는 다람쥐의 미래는 어떨까요? 그대로 간다면 얼마 못 가 성인병에 걸려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할 것입니다. 야생으로 돌아간다면 더 참혹하겠지요? 길들여진 다람쥐, 게으른 비둘기, 느림보 초식동물이 겪을 그 다음 일이 눈에 선명합니다.

밀림의 왕 사자에 관한 다큐를 본 적이 있습니다. 암사자와 달리 수사자는 사냥에 실패할 때가 훨씬 많다고 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이없게도 머리가 너무 커서 신속하게 방향 전환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풀을 뜯어먹으며 배고픔을 달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사냥에 실패해서 풀을 뜯어먹는 사자 생각만 해도 우습지 않습니까?

문득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오버랩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영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좋은 양육 프로그램이 있는 곳에 열심히 참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뛰어난 설교자가 있는 교회나 그의 설교가 방송되는 매체를 여기 저기 찾아다니며 열심히 듣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아니 이제는 일부러 찾아다니지 않아도 안방까지 친절하게 배달해 주는 온갖 매체 덕분에 우리는 쉽게 영의 양식을 먹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힘든 훈련을 마친 뒤에 그가 하는 일이란 또 다른 방영 프로그램을 찾아 마우스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사람들의 머리는 사자만큼이나 커졌고 자부심은 휘날리는 갈기만큼이나 사방으로 뻗어 있습니다. 지식의 체중은 한계를 훨씬 넘어 발로 지탱할 수 없을 만큼이고 한번 움직이려면 버퍼링나는 컴퓨터처럼 여간 답답한 게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절하게 먹여 주는 많은 프로그램들 덕분에 반찬타령이나 하고 있습니다. 저러다 앉아서 굶어죽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입니다.

길들여진 야생동물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사람들이 던져 주는 먹이가 아니라 체중을 줄이고 야성을 되찾는 일일 것입니다. 끝없는 움직임이 필요하고 절제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라면 굶어야만 하는 상황도 피할 일은 아닙니다.  멋스러움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다이어트 하지 않으면 질병에 걸리거나 사냥감이 되어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이 아니라 깨달음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은 영적인 다이어트로서 매우 좋은 방법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꾸준히 배운 바를 행하라고 가르칩니다. 스스로 하지 않으면 강제로 군살빼기를 하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전쟁과 재난이 이에 해당합니다. 광야로 내모는 것 역시 우리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다이어트 프로그램중 하나이지요. 역경과 환란을 감사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시련과 고난의 과정을 인내로 견뎌내며 영적인 지방과 콜레스테롤을 제거해야 합니다. 사용하지 않았던 근육의 감각을 회복하고 민첩함과 근력을 유지해야 합니다.

뒤뚱거리는 비만 그리스도인, 제대로 달리지도 못하는 머리만 큰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은지요. 다이어트가 무조건 살빼기가 아니라 필요한 체중과 체력을 유지한다는 의미라면 우리는 매일 먹어야 하지만 또 매일 움직여야 합니다. 야생에서도 통할 수 있는 힘과 민첩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머리만 커서도 안 되고 지방이 많아서도 안 됩니다. 사냥감이 되지 않고 사냥꾼이 되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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