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근 목사 (유니온교회 원로목사, 서울신학대학교 교환교수)

헐리웃 가까이서 살 때였습니다. 중하류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지만 비교적 조용한 동네였습니다. 인심도 좋은 편입니다. 그런데 우리 집과 한 울타리를 쓰는 이웃집에는 80세가 넘은 파파노인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결혼한 뒤에 줄곧 60년 가까이 이 집에서 살아왔답니다.
  “우리 집 아이들 셋이 모두 여기서 태어났고 학교에 다녔지요. 목사님댁 세 아이들을 보니 우리 애들 어릴 적 생각이 떠올라요.”
  어느 날 문밖에서 만난 할머니의 이야기였습니다. 할아버지는 몸이 불편해서 바깥출입을 거의 안한답니다.
  그 집과 우리 집은 나무판대기로 울타리를 했는데 하도 오래 되어 나무가 썩었고 개구멍 몇 개가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상대편 집 뒤뜰이 환하게 보입니다. 게다가 우리 집에는 나이가 꽤 먹은 아보카도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일 년에 두 번씩은 열매가 주렁주렁 열립니다.
  “그 아보카도 좀 나눠 줄 수 있나요? 가을에 감이 익거들랑 좀 따가도록 할 터이니까요.”
코리언들은 감을 무척 좋아하는 걸 알고 있다면서 할머니가 그런 제의를 해왔습니다. 우리 부부도 기다리던 제안이었습니다.
  가을이 되었습니다. 그 감나무에 빨간 감들이 금방 뚝뚝 떨어질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바구니를 들고 그 집에 들어갔습니다. 할머니는 없고 할아버지만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양해를 구했습니다.
  “옆집에 사는 사람입니다. 할머니가 우리 뒤뜰에서 아보카도를 따가셨지요. 그리고 감을 따가도 좋다고 했어요. 좀 따가도 되겠어요?”
  “오케이, 노 프로블럼.” (좋아요, 아무 문제 없어요).
그래서 좋은 감을 따서 바구니에 한참 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 아래에 사는 걸걸한 여자 하나가 달려오더니 당신 누구냐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온 동네가 다 들릴 정도라 여기  저기서 사람들이 내다보았습니다. 오래 살았다는 이유로 스스로 그 동네 통장 노릇을 하는 여자였습니다. 그리고 이 집 할아버지의 여동생이랍니다.
  “이 옆집 사는 사람입니다. 할아버지께서 좋다고 해서 따는 건데요.” “그런 소리 마세요. 할아버지가 내게 비상전화 했어요. 도둑놈이 들어왔다고요... 그래서 경찰 부르려다가 내가 먼저 확인하러 온 거예요.”
  그 말 들으니 별안간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신문기자를 지낸 사람이라 신문기사 제목부터 떠올랐습니다.
  “한인 목사, 백주에 감 도둑질하다 발각”
  그 할아버지가 좋다고 했는데도 새까맣게 잊어버린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습니다. 치매환자였기 때문입니다.
  “후유~”
  만약 그 자칭 통장이 경찰 먼저 불렀다면 저의 목회 인생은 끝날 수도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왈가닥 여사에게 꾸벅 인사를 했습니다. 댕큐를 연발하면서....그런 뒤부터 치매에다 ‘딴 소리 병’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딴 소리 병은 정말 몹쓸 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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