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근 목사 (유니온교회 원로목사, 서울신학대학교 교환교수)

어떤 교회가 둘로 갈라져 싸우는 와중에 한 쪽 편 담임목사가 졸도해서 그만 식물인간이 되었답니다. 그 목사는 한국에서 유명대학 교목도 지내는 등 이름깨나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식물인간이 되는 데는 유명한 것이나 학위가 여럿인 것은 아무런 관계가 없답니다. 식물인간이란 대뇌가 손상을 입어 의식이 없고 운동을 전혀 못하지만 호흡과 혈액순환은 가능한 환자를 뜻합니다. 말하자면 식물과 똑같은 수준으로 주저앉은 인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가족들의 고통은 또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렇다고 무슨 뾰족한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안락사에 대하여도 가족들이 의논해 보았지만 그 식물 목사가 그건 살인과 같다고 평소 주장했기에 더 논의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그 일 때문에 교회는 싸움을 그치고 한 자리에서 예배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식물 목사를 위하여 간곡히 기도했습니다. 그게 효험이 있었을까, 십년만에 식물인간을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돌려 먹는다면 식물인간이 된다는 것은 축복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무한한 가능성을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신의 성품도 가질 수 있고 (벧후 1:4), 동물의 본능도 가지고 삽니다. 그런데 이제는 식물도 되고, 한 걸음 더 나가면 죽어 무생물도 된다는 것이 확인됩니다. 다시 정리해 보면 사람은 하나님과도 친구가 되고, 사람다운 사람도 됩니다. 그러나 동서양에서 모두 ‘개자식’이란 말을 욕으로 쓰듯이 동물로도 전락합니다. 게다가 식물도 되고 무생물도 될 수 있다니 이 어찌 큰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학자들은 인간의 이런 모습을 가리켜 가소성(可塑性, plasticity)이라고 한답니다. 플라스틱처럼 열이나 압력을 가하면 장난감도 되고, 필통도 되고, 그릇도 되고, 비행기 부품도 되어 공중을 훨훨 날아다니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받은 축복이 여러 가지입니다만 이런 가소성을 빼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한 부모에게서 나온 아이들도 하나는 손놀림을 잘하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다른 아이는 발놀림을 잘하는 축구선수가 됩니다. 한 스승의 문하에서 배운 아이들이지만 어떤 아이는 나라의 큰 재목이 되고 다른 아이는 돈 버는 일에 귀재(귀신 같은 재주꾼)가 됩니다. 심지어 어린 아기가 사자 사이에서 자라면 외모조차 사자처럼 되고, 두꺼비 사이에서 자라면 떡두꺼비처럼 된답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만 가소성을 선물로 주셨을까요? 필경은 무슨 곡절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한 가지만이 아니고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사람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녀로 만드셨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말벗이 되도록 하신 뜻도 있습니다. 모든 동물과 식물들과 무생물을 다스리고 관리하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인간은 ‘교육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뜻이 있습니다. 교육받지 않으면 동물이나 식물 혹은 무생물처럼 되고, 교육을 잘 받으면 인간다운 인간이 될 가능성을 주셨습니다. 만약 영적 교육 곧 최우수 교육을 받으면 모세처럼 하나님과도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출 33:11; 요 15:15).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