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성환 목사(온누리교회)

반드시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면 언제나 갑작스러운 것이 죽음입니다. 사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삶이란 태어날 때 받은 선고의 집행이 유예된 시간일 뿐이지요. 유예기간이 길어질수록 인간은 선고받은 사실 자체를 잊습니다. 하지만 당사자가 잊었을 뿐, 효력이 소멸된 것은 아닙니다. 익숙함 때문에 생긴 착각일 뿐입니다.

착각에서 빠져나오게 만드는 것은 선고의 집행입니다. 그날은 도적같이 옵니다. 그리고 인간들로 하여금 간과하고 있었던 진실에 눈을 돌리게 해주지요. 그것은 어떤 일에 대한 궁극적 결정권이 인간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결정권은 제한된 범위내에서 위임받아 사용하는 것일 뿐, 궁극적으로는 신에게 있습니다. 죽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또한 죽음은 인간에게 주어지는 기회가 무한하지 않다는 사실도 깨닫게 합니다. 실패가 아무리 치명적이라 하더라도 살아 있다면 아직은 역전의 기회가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죽었다는 것은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고 난 후에 그 사람의 성공과 실패를 ‘평가’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잘 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합니다. 하지만 잘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정말로 잘 사는 사람들은 잘 살기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잘 죽기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Well Being이 아니라 Well Dying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자신이 죽고 난 후 5분 뒤를 생각해 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입니다. 자신의 빈소에 누가 올 것인가? 어떤 조사가 읽혀질 것인가? 어떤 비문이 기록될 것인가에 대해 미리 생각해 본다면 삶의 태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자신의 장례식장을 미리 그려 보는 것은 어떨까요? 장례식장이야말로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자리일 테니까요.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고인의 삶을 미화하거나 좋은 일만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의 수고를 마친 사람에 대하여 그리고 고인의 유족들을 위해 보여줄 수 있는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웬만한 것들은 용서되고 이해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례식장은 화해와 하나됨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예의로 덮을 수 없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추모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어떤 이들이고 또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입니다. 이는 장례식이 얼마나 성대하고 화려한가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영향력에 관한 것입니다.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추모하는가는 그 사람의 영향력의 크기를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많이 슬퍼하는가는 그 영향력의 깊이를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에서 어른까지, 정치인에서 예술인까지, 내국인에서 외국인까지 추모하는 삶을 산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영향력있는 삶의 주인공들은 건물을 남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재산을 남기는 사람도 아닙니다. 사람을 남기는 사람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남깁니다. 그의 목소리, 그의 향기, 그의 비전이 따르는 사람들의 가슴에 오래 오래 기억됩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 비전을 물려받은 사람들에 의해 바뀌게 됩니다. 그는 죽었으나 사람들의 마음 속에 살아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으로부터 받게 될 질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신은 내게 물을 것입니다. “내가 네게 준 시간을 가지고 무엇을 했느냐”고. 그때 “다 이루었습니다”라고 자신있게 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후회와 미련이 전혀 없이 살다가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요. 하지만 적어도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에 대해 최선을 다했다는 평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적지 않습니다. 만약 그럴 자신이 없다면 당신은 남은 인생 기간 동안 이를 위해 열심히 준비해야 합니다. 현재는 영원을 위한 준비의 과정이니까요.
시간이 지나면 내일은 현재가 되고 오늘은 역사가 됩니다. 내가 써가는 인생의 한 페이지가 훗날 어떤 역사로 남을지 한 번쯤 생각해 보면서 자신의 장례식장을 상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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