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성환 목사(온누리교회)

“함께”라는 말. 지금 당신에겐 이 단어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요. 어떤 사람을 생각하면서 이 단어를 떠올리면 소망과 행복의 감정이 생기지만, 다른 어떤 사람을 생각하면 정반대의 감정이 생길 수 있습니다. 죽기보다 싫다고 할지도 모르지요. 관계적인 존재로 태어났기에 늘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이 인생인데 그 내용은 천차만별인 듯합니다. 함께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면서 한 몸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억지로 함께 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함께 사는 삶이 가능하려면 그리고 그것이 불행이 아니라 행복이려면 두 개체 사이에 뜻이 맞아야 합니다. 뜻이 일치하면 단칸방도 더 없이 편안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구중궁궐도 바늘방석같겠지요. 부부 사이도 그러하고 목회자와 교인 사이도 그러합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뜻이 맞지 않은 상태로 혈연적 관계만을 강조하며 한 지붕, 한 방향을 고집하면 피차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핏줄이라는 이름하에 학대와 상처를 심어줄 뿐이니까요.

그러면 어찌해야 할까요? 누군가와 함께 살아야 하는데 서로 뜻을 맞추어 살기가 쉽지 않으니 말입니다. 가치관이 달라서 힘들고, 자기의가 강해서 힘들고, 타이밍이 맞지 않아 힘들 때가 참 많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아무리 안 맞기로서니 이렇게까지 안 맞느냐며 상대와의 성격 차이, 가치관의 차이를 탄식하기도 합니다. 서로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함께 살아야 한다면 그 여정이 얼마나 지루하며 심적 부담감이 크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이들은 함께 살기를 포기하고 각자의 길을 선택합니다. 오죽하면 그랬겠습니까? 과감하게 이별을 선택하고 나서 오히려 홀가분하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진작에 이렇게 할 걸 그랬다며 자신의 선택이 너무 늦었다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이해가 되신다구요? 감당할 능력도 안 되면서 “함께”라는 법칙에 매여 억지로 살아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율법의 노예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 맞는 또 다른 사람을 찾는 것이 더 낫겠다 싶기도 하구요.

하지만 그런 바램이야말로 거의 대부분 착각이며 또 다른 이별을 향한 잘못된 시작일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문제 극복을 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다른 장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여전히 주저앉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함께 하지 못하는 근본 원인이 두 사람의 ‘관계의 역학’에 있지 않고 ‘그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름을 조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고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함께 가면 좋겠는데, 또 함께 가야 하는 게 맞는데 그게 너무 힘들면 말입니다. 함께 하는 것이 힘든 만큼 함께 하지 못하는 것도 힘들다는 것을,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훨씬 힘들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할 수 있을까요.

함께 하기 위해 노력하는 고통이 함께 하지 못함으로 겪어야 하는 손해보다 적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할 수 있을까요. 말로 해서 안 되고 훈련으로 안 되면 결국 경험해 보아야만 할까요. 인간이란 그렇게 어리석은 존재인가봅니다. 고등수학문제를 풀고 첨단기기의 사용법도 쉽게 익힐 줄 아는 존재가 윤리적이며 종교적인 진실에 대해서는 왜 그리도 무지할까요.

경험하기 전에 분별하는 것이 지혜라면 겪고 나서야 얻는 것이 교훈인 듯합니다. 말해도 모른다면 어쩔 수 없겠지요. 그냥 내버려두는 수밖에. 그렇게 해서라도 깨닫는다면 그나마 다행 아니겠습니까? 거기까지 가길 원치 않는다면 다른 길은 없을까요?
없습니다. 순종과 포기의 길 외엔. 여기에는 의지적인 면도 있고 감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사람이 많지 않네요. 포기하는 지혜는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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