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성환 목사(온누리교회)

얼마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여러 해만에 한국을 방문한 아이들이 부모를 따라 집안의 어른들과 지인들을 만났습니다. 오랜만의 즐거운 만남을 마치고 헤어지려는 순간이었습니다. 작별인사를 하던 지인이 아이들에게 뭔가를 주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 막내 녀석의 손에 쥐어 주면서 “가다가 맛있는 거 사먹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다 주고 싶은데 지금 이것밖에 없구나. 막내니까 네가 받아”라고 말했습니다. 정에서 우러난 순간적인 호의였고 보통의 한국 어른들이 보여줄 수 있는 자연스런 친절이었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안 것은 돌아오는 차 안에서였습니다.

네 살 위의 누나들 마음이 몹시 상했습니다. 혜택이 동생에게만 돌아간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기에는 그들은 아직 어렸던 모양입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그 아저씨가 한 행동이 Unfair하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거기에 그런 단어가 적합한지를 놓고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행복감이 커지거나 작아지는 이유는 비교의 상황과 능력이 생기면서부터입니다. 세상에 자기 혼자밖에 없을 때에는 자신과 신, 자신과 세상과의 관계만이 전부였습니다. 그곳에서 인간은 자신에게 발생한 모든 상황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은 작고 세상과 신은 크기에 그로부터 오는 어떤 작용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가 지닌 한계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고 그가 나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부터는 생각이 달라집니다. 나에게 발생한 일이 그에게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순간 감정은 기쁨이 될 수도 있고 분노가 될 수도 있습니다. 행복감의 크기도 매우 유동적입니다. 영향을 주는 것은 바로 ‘다른 사람’입니다. 그때부터는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만큼이나 ‘그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의 일을 평가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자기를 절대화할수록 모든 것은 ‘상대화’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형식적이고 수평적인 관점에서만 Fair와 Unfair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의 특징과 상황에 맞게 대우해야만 하는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형식적이고 수평적인 관점에서만 본다면 하나님은 정말 Unfair 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A와 B를 다르게 대우하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분에게 분노합니다. 첫째아들이 돌아온 동생에 대한 아버지의 태도에 분노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자신의 정의와 공평을 내세워서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분의 다른 행위에 대해서는 분노하지 않습니다. 죄를 지은 당신의 행위에 대하여 죽음이라는 처벌 대신 용서라는 부당한 판결을 내리신 것에 대해서는 은근슬쩍 넘어가려 합니다. 시간과 공간의 법칙을 깨트리고 ‘끝까지’ 사랑하는 그분의 부당함에 대해서는 분노하지 않습니다. 용서야말로 가장 부당한 판결입니다. 그런데도 이를 반납하거나 따지는 이가 없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만을 보고 손익을 계산할 뿐입니다.

Unfair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달라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 속에서 fair의 유무를 찾는 것은 매우 제한적이며 불완전합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행복감만을 느끼게 할 뿐입니다. 하나님과 당신과의 일대일의 관계에서 수직적으로 공평과 부당함을 생각하십시오. 오직 진리와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의 행동에 대한 옳고 그름을 생각하십시오. 상대화된 자리에서 진정으로 절대의 자리로 자신을 옮겨놓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신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각 사람을 편애하시는 그분의 불공평한 사랑이야말로 완전한 공평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비로소 각 사람은 각자에게 주어진 부당한 용서를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누릴 수 있습니다. 비교에서 비롯된 잘못된 생각으로 당신에게 주어진 은혜를 날려 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