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근 목사 (미주성결대 명예총장)

최근 성결교회 월간신앙지 <활천>에서 ‘설행일치’(說行一致)라는 말을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설교와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행일치’라면 믿음과 행동이 일치된다는  뜻이고, ‘지행합일’이라면 지성과 행동이 하나라는 사자성어입니다. 그래서 유추해낸 말이 설행일치입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가 마리아를 혹독하게 비판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에 발에 부어 낭비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마 19:21; 요 12:5)고 하셨던 것을 모르느냐는 비난입니다. 그러나 실상 비난의 대상은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가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오신 분이 어쩌면 이토록 많은 향유를 자기 자신만 위하여 낭비하느냐며 칼끝을 정면으로 겨누었습니다.
  이 대목만 보면 가룟 유다는 위대한 인물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숨도 크게 못 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할 때에 그는 과감하게 나서서 스승도 비판했다는 용기에 박수를 보낼 만합니다. 진리란 겉과 속이 똑같은 것인데 예수님께서 안팎이 모순된 행동을 하신다면 스승의 자격이 원천적으로 없다는 선언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유다의 음모를 충분히 알고 계셨습니다.
  “유다야, 마리아를 가만 두어라. 나의 장례식 준비하는 거야. 한 번밖에 없는 내 장례식에 향유를 사용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가난한 자들을 더 크게 돕는 일이야.” 유다가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의 지지자로 돌아섰으면 그는 정말 위대한 인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비판적 지지자의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그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파괴적 비판자’로 전락했습니다. 스승을 죽이는 일에 협력하고 돈을 벌었습니다.
  교회에도 목사 비판자들이 많습니다. 없는 말도 만들어 돌리는 신자들이 많다는 건 목회한 사람은 누구나 압니다. 그래서 목사는 비판적 지지발언인지 아니면 파괴적 비난발언인지를 잘 구별해야 합니다.
   하지만 목사 입장에서는 그것이 건설적 비판이건 파괴적 비난이건 행여 설행일치의 허점이 있었는지 세심히 살펴야 합니다. 설교하는 걸 보면 천사인데 생활하는 걸 보면 악마인 경우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요즈음에도 그런 목사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성도라면 절대로 부정적인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설교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경구입니다. 그러나 이 말처럼 설행일치가 안 되는 것이 또 있을까요? 자신은 부정적인 말로 범벅을 해서 시범을 보이면서도 성도들만은 긍정적으로 말하라는 것입니다.
    “부정적으로도 말씀하세요. 성경에도 얼마든지 있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세요. 부정을 넘어 긍정에 이르는 비판적 지지자가 되시는 것이 신앙 성숙의 길입니다.”
 그렇게 바꿀 수는 없을까요? 영악스러운 평신도들에게는 그것의 약효가 훨씬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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