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길영 목사(순복음시카고교회)

러시아에서 정교가 지배하던 1800년대 초, 부패한 세상을 뒤집어 엎으려고 계획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계획이 실패하는 바람에 그는 28세에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사형을 집행하기 전에, 사형 집행관이 그에게 5분의 시간을 주었습니다. 28년을 살아온 그 사형수에게 주어진 최후의 5분은 비록 짧았지만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사형수는 ‘마지막 5분을 어떻게 쓸까?’ 고민끝에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를 알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작별 기도를 하는 데 2분, 오늘까지 살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곁에 있는 다른 사형수들과 한 마디씩 작별 인사를 나누는 데 2분, 그리고 나머지 1분은 눈에 보이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지금 이 순간까지 서있게 해준 땅에 감사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흐르는 눈물을 삼키면서 가족들과 친구들을 잠깐 생각하며 작별인사와 기도를 하는데 벌써 2분이 지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 돌아 보려는 순간 “아~! 이제 3분 후면 내 인생도 끝이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28년이란 지난 세월을 금쪽같이 아껴 쓰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되었습니다. “아~! 다시 한 번 인생을 살 수만 있다면... ”하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데, 갑자기 황제가 보낸 사신이 달려오면서 외쳤습니다. “멈추어라. 사형을 멈추어라. 황제께서 사형집행 중지명령을 내리셨다.” 그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구사일생으로 풀려난 그는 사형집행 직전에 주어졌던 5분의 시간을 생각하며 평생 동안 ‘시간의 소중함’을 간직하고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열심히 살았다고 합니다.

그가 바로 톨스토이에 비견되는 세계적 문호로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영원한 만남”등 불후의 명작을 남긴 도스토옙스키입니다. 죽음의 공포 가운데 하루하루 마음 졸이고 있던 사형수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형면제 소식을 들었다면,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사형수에게 가장 기쁜 소식은 죄를 용서한다는 대통령의 사면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가장 기쁜 소식’이 다를 수 있습니다. 만약 제가 “당신에게 가장 기쁜 소식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각자 다른 대답을 할 것입니다. 거액의 빚을 갚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기쁜 소식은 부채 탕감입니다.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하는 불임여성에게 가장 기쁜 소식은 임신입니다. 영주권 문제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에게 가장 기쁜 소식은 이민국으로부터 날아온 영주권 허가장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잃어 버린 부모에게 가장 기쁜 소식은 실종된 자녀의 귀가입니다. 현대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려 죽음을 기다리는 환자에게 가장 기쁜 소식은 치료방법의 발견입니다.

이처럼 처지와 환경과 상황에 따라 가장 기쁜 소식은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가장 기쁜 소식이 되지만, 오히려 그 소식이 나에게는 가장 나쁜 소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겨울철에 춥지 않을 것이라는 일기예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됩니다만, 난방 기구를 만드는 사람들이나, 오리털 파카를 파는 사람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날씨가 추워야 히터가 불티나게 팔리고, 오리털 파카를 사서 입기 때문입니다.
또 1945년 8월 15일, 일본천황이 항복했다는 소식은 36년 동안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채 고생하던 한국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기쁜 소식이었지만, 일본 사람들에게는 가장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람마다 가장 기쁜 소식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아무리 기쁜 소식이라 할지라도, 그 소식은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해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소식이 있습니다. 세상의 어떠한 소식보다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의 탄생소식은 큰 기쁨을 주는 좋은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은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가장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이야말로 우주가 생긴 이래 전해진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왜 기쁜 소식이라고 할까요?  모두가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메시야는 구원을 주는 분이십니다. 왜 메시야를 기다려야 했나요?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이, 죄 때문에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모든 사람이 다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습니다. 도덕적인 사람도, 양심적인 사람도, 자선을 많이 하는 사람도 ‘모든 사람’ 속에 포함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죄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이 죄 문제는 사람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메시야가 필요했습니다. 구원을 주는 복음의 소식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길로 오셨습니다. 

공자는 “조문도 석사가의”(朝楣道 夕死可矣)라, 즉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가 말한 “도”는 ‘사람답게 사는 도리’를 의미하지, 영생을 얻는 도리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전하는 도는 생명의 도입니다. 영원히 멸망할 운명에서 건짐 받는 도를 말합니다. 마귀의 종 된 신분에서 놓여나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도를 말합니다. 죄인이 죄를 청산하고 구원받는 도를 말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요 영생의 도가 되십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이야말로 모든 사람이 들어야 할 가장 긴급하고 중요한 소식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인류최대의 가장 큰 엄청난 사건입니다. 가장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고 했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으로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보여 줍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고 말씀합니다. 이 좋은 소식을 내 것으로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셨지만, 이 기쁜 소식을 믿는 사람들만이 평화를 누리고 영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 믿고 모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모시고 나아가면 길이 열립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붙잡고 영원까지 이르게 됩니다. 어려운 시대에 주님을 모시고 승리하시고 인생에서 가장 귀한 성탄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순복음시카고교회
www.ifgcc.org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