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길영 목사(순복음시카고교회)

프랑스 최고의 화가 르느아르는 원래 도자기 공장의 공원이었습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르느아르는 틈틈이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리고 이 기회를 이용해 화가로 등단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심한 신경통으로 손을 거의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붓을 손에 붙들어 매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한 방문객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런 손으로 어떻게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까?” 르느아르는 태연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림은 손으로 그리는 것이 아닙니다. 눈과 마음으로 그리는 것입니다. 눈과 마음이 가장 좋은 붓입니다. 교만한 붓으로 그린 그림에는 생명력이 없어요. 이 고통이 내게는 소중한 스승이랍니다.” 그는 교만한 붓으로 그린 그림에는 생명력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그려야 하겠습니까? 눈과 마음으로 그리는 아름다운 인생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라는 하얀 도화지가 우리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그림을 그려가야 할까요? 해가 바뀌어도 국제정세는 어둡기만 합니다. 경제도 어렵습니다. 우리 조국의 환경도 어렵습니다. 특히 북한의 미래는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상황과 여건은 예년과 같은데 새해가 밝았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희망을 노래하고, 희망을 부르짖어야 합니다.

독일의 작가 에른스트 블로흐는 “인간은 끊임없이 희망을 품는 존재요, 극한 상황에서도 인내와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만드는 힘은 희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에게 희망이 있는 한, 어떠한 시련도 기꺼이 견뎌낼 수 있습니다.
<가이드 포스트>에“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법” 이라는 글이 실렸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23살의 요요 콜린스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꿈으로 부풀어 있었습니다. 대학 시절 운동선수였던 그는 훌륭한 코치가 되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자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야영을 가서 강변에 있는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흐르는 강물이 너무 시원스럽게 보였습니다. 순간적으로 뛰어들고 싶은 욕망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순간의 실수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강물이 너무 얕아서 강바닥에 머리가 부딪힌 것입니다. 정신이 들어 눈을 떠보니 병원 침대였습니다. 숨을 쉬고, 음식을 씹거나 말하는 것만 가능했습니다.“척수가 심하게 손상되었습니다. 평생을 전신마비 상태로 살아야 합니다.”라고 의사는 말했습니다. 청천벽력과 같은 선언이었습니다. ‘내 인생은 모두 끝났구나’원망과 분노가 치솟았습니다. 절망 속에서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어느 날 팔에 부착된 특수 장치를 통해 성경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믿기지 않는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처음에는 “모든 것” 이라는 단어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렇게 전신마비가 되었는데’ 이런 상태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단 말인가? 나같이 쓸모없는 인생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선한 일을 이룰 수 있을까? 이 말씀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주님의 사랑이 느껴졌습니다. 그 말씀은 한 줄기 빛과 소망을 갖게 했습니다. 그는 일생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기로 작정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요요 콜린스는 주님을 찬양하는 복음송 가수가 되어 앨범을 발간하고, 수많은 교회에서 찬양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콜린스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다섯 가지 비결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라. 둘째, 하나님의 말씀으로 당신의 영혼을 회복하라. 셋째, 부정적인 의식을 제거하라. 넷째, 스스로 새로운 꿈을 찾아 키우도록 하라. 다섯째, 결실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를 가져라. 그는 비록 전신마비의 상태이지만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통해 절망을 극복하고 새로운 희망의 빛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힘들고 지치고 곤고하십니까? “나는 안 돼. 할 수 없어. 나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아.” 이렇게 고민하며 절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불빛이 없는 캄캄한 밤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고독과 절망 속에 방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바로 그 절망의 자리, 고통의 자리에 다가오셔서 새로운 희망의 빛을 보여 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 주변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존재합니다. 희망을 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낙심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희망을 주는 사람은 목표가 분명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떤 환경에 놓여도 목표를 놓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람들에게 꿈을 주는 자가 됩니다. 어떤 상황, 어떤 조건에서도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나도 살고 남도 살립니다. 사람은 희망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1879년 10월 18일,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은 일정 전압에도 견디는 필라멘트를 만들기 위해 13개월이나 계속된 연구에 몹시 지쳐 있었습니다. 그때 한 제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11만 번이나 실패한 일인데요” 그러자 에디슨이 대답했습니다. “실패는 무슨 실패,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11만 가지의 방법을 알아냈는데. 이제 분명히 성공하게 되어 있다네” 실패중에도 희망을 노래하면 노래하는 대로 됩니다. 이런 걸 긍정적인 사고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긍정적 사고는 반드시 성공을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정신과 의사인 토마스 알렌은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신체를 이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의 해안 끄트머리에 큰 바위가 있다고 합니다. 그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가 끝입니다.’ 이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여기가 끝인 줄 알고, 그 말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이곳을 넘어가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이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1492년에 그는 신대륙을 발견합니다. 여기가 끝이라는 말을 그대로 믿은 사람들은 그 너머에 아무 것도 없는 줄 알고 평생을 살았지만, 그 너머에 분명 무엇인가 있다고 생각한 사나이는 신대륙을 발견해 당시 사람들을 꿈에 부풀게 했습니다.

단테의 신곡을 보면 지옥문에 이런 말이 걸려 있답니다. ‘이곳에 들어가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리시오.’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희망을 노래하고 희망을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디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붙잡고 나아갈까요? 우리가 가져야 할 진정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아무리 현실이 처절하고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그 예수님을 내가 믿고 나아가면 나는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진정한 인생이 새롭게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셔서 나를 인도하십니다. 절망의 죽음도 생명의 부활로 바꾸셨습니다. 죽음까지도 부활로 바꾸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그 무엇인들 바꾸지 못하겠습니까? 새해가 밝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희망으로 출발하십시오. 예수님을 모시고 나아가면 길이 열립니다. 밝아오는 새해에 주님을 모시고 승리하시는 여러분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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