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길영 목사(순복음시카고교회)

두 나그네가 불덩이 같은 태양이 작렬하는 사막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한 나그네는 너무 고통스러워 여행을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나그네는 지친 친구를 위로하며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무덤뿐이었습니다. 이때 부정적인 친구가 말했습니다. “이제야 올 것이 왔군. 저 사람들도 우리처럼 지쳐서 쓰러져 죽었을 거야” 반면에 긍정적인 친구는 이렇게 말하며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무덤이 여기에 있다는 것은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다는 희망의 징표라네” 과연 조금 더 걸어가다 보니 쉬어갈 마을이 나타났습니다. 똑같은 현실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인생의 미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행, 불행이 결정됩니다. 눈앞에 나타난 공동묘지를 보고 저 사람들처럼 죽겠구나 하고 염세적으로 생각하는 사람과, 공동묘지가 있으니 틀림없이 마을이 가까이 있을 거라고 믿는 긍정적인 사람의 미래는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그렇습니다. 새해에 우리는 어떤 마음과 자세로 살아가야 할까요?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두 가지 자세가 있습니다. 긍정적인 자세와 부정적인 자세입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첫번째는 그 사람이 하는 말을 잘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 이 사람이 어떤 성격이구나” 하는 것도 드러나고, 사고방식도 드러나고, 자라온 환경도 드러나고, “지금 이 사람이 어떤 처지에 있구나” 하는 것도 다 드러납니다. 특히 그 사람이 늘 자주 쓰는 말이 무엇인지 알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예”(Yes)라는 말을 더 많이 쓰고 있나요? “아니요”(No)라는 말을 더 많이 쓰고 있나요?

세상에는 ‘예스맨’(Yes-man)과 ‘노맨’(No-man),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예스맨’은 말 그대로 ‘Yes’를 잘하는 사람입니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순종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좋습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한번 해봅시다.” “잘 될 겁니다.” 이런 말을 하면서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노맨’은 말 그대로 ‘No’를 잘하는 사람입니다. 매사에 부정적이고 반항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언제나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안 돼.”“그걸 말이라고 하냐?”“무슨 일을 그 모양으로 하는 거야?” “난 그런 거 싫어해” 등등.

  그렇다면‘예스맨’과 노맨’ 중에 어떤 쪽이 좋을까요? 얼핏 생각하면 ‘예스맨’이 더 좋을 것 같지요. 하지만‘예스맨’이 무조건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예스맨’만 있다면, 큰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좋게만 보기 때문에 건전한 비판을 할 수 없습니다. 일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도 바로잡을 길이 없습니다. 모두가 “좋다, 좋다”고만 하면 발전이 없는 법입니다. 건전한 비판이 있어야 발전이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세상에‘노맨’만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는 일마다 안 된다고 하니 아마 싸움도 많이 생기고, 서로 다투다가 끝날 것입니다. 마음만 상하고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스맨’만 있어도 안 되고, 그렇다고 ‘노맨’만 있어도 안 됩니다. 모든 조직과 모임에는 적당히 ‘예스맨’과 ‘노맨’이 섞여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발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개인은 어떨까요? 앞서 말한 대로 우리가 조직이나 모임에서, 가정이나 회사나 이웃들 사이에서 무조건 ‘예스맨’이 되는 것은 썩 좋은 일이 아닙니다. 어떤 때에는 손을 들고 “아니요” 하고 말하는 것이 용기입니다. 분명히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도 “좋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비겁한 행동입니다. 예수님도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 5:37)고 하셨는데 이 말은 ‘예’ 할 것은 반드시 ‘예’ 하고, 아닌 것은 반드시 ‘아니라’고 하라는 뜻입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어야 참된 용기인 것입니다. 따라서 무조건적인 ‘예스맨’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무조건의‘예스맨’보다는 무조건의 ‘노맨’이 더 나쁩니다. 이런 사람은 정말 도움이 안 됩니다. 안 되는 것과 되는 것을 가려서 해야 하는데 무조건 안 된다고 합니다. 건전한 비판을 해야 하는데 무조건 비판부터 하고 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을 만나면 될 일도 안 되고, 해야 할 일도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조건 ‘노맨’은 최악입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갖지 못한 사람, 매사를 삐딱하게 보고 일단 잘못된 점부터 찾고 보는 사람, 트집부터 잡고 안 될 이유부터 찾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하기 짝이 없습니다.

두번째는 어떤 눈으로 바라보느냐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무조건의 긍정도 안 좋지만 무조건의 부정은 더 위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긍정적인 자세와 눈을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해 긍정적인 눈을 가져야 합니다. 나 자신을 향해 ‘No’라고 말하기 전에 ‘Yes’ 하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나는 못해.”“나 같은 게 뭘 하겠어?” 하기보다 “나는 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도 “저는 못합니다.” “저 같은 게 뭘 하겠습니까? 저는 안 됩니다.” 하지 말고, “저는 믿습니다. 제가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제가 믿는 대로 이루어 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 긍정적인 눈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을 보면서 “왜 저 모양이야?” “저렇게밖에 못하나?” “형편없어”하고 비판부터 하지 마십시오. 애정도 사랑도 없는 이런 비판과 판단은 그 사람에게 큰 상처를 줍니다. 깊은 실망감을 안겨 주고, 그 사람은 이런 말을 듣는 순간에 힘이 빠지고 맥이 빠지고 맙니다. 이만저만 피해가 큰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부정과 무조건적 비판의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 안에 부정적인 생각이 자리잡고 있으면 건강할 수 없고 하는 일도 잘 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긍정적인 마음과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만약“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어”(“I can do everything!”)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교만이지만,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어, 주님 안에서”(“I can do everything in Jesus Christ!”)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믿음입니다. 그저 “예수 안에서”(in Jesus Christ)라는 한 마디가 더 붙었을 뿐인데 두 말은 엄청나게 다른 뜻이 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하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속에 있는 믿음대로 긍정적으로 말하고, 속에 있는 믿음대로 긍정적으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대로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긍정의 힘이요 소망의 힘입니다. 새해를 살아가면서 긍정적으로 말하고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이루려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십시오. 여러분 안에 계신 예수님이 여러분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새해에 주님을 모시고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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