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근 목사(미주성결대 명예총장)

 매년 연말이 되면 교회에서도 여론조사를 해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지난 1년간 최악의 설교와 최선의 설교가 무엇이냐는 항목도 있습니다. 부담 없이 의견표시를 하도록 익명으로 제출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담임목사를 더 좋은 설교자가 되도록 돕는 일이라는 설명도 붙였습니다. 그런데 최선의 설교는 꽤 많이 쓰는 데 반하여 최악의 설교는 칸이 텅 비어 있곤 합니다. 실상 설교자로서는 최선의 설교보다는 최악의 설교를 파악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아무튼 우리 목사님 자랑스러워요. 솔직하게 평가 받으시겠다는 용기가 있으시니까요.”그런 찬사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의 목소리도 있습니다. 설교에 점수 먹이느라고 전혀 은혜가 안 된답니다. 그래도 이 모든 것들은 목회 개선에 도움이 됩니다. 목회자도 자주 자기 자신을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매무새를 다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터에 제일 크게 은혜 받은 대목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 가운데 최선과 최악은 각각 무엇일까 하는 데 생각이 닿았습니다. 그분의 설교야 물론 모두 다 100% 성공작일 것을 믿습니다. 하지만 설교의 효과라는 기준에서 보면 최악도 있고 최선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가령 베드로 형제를 향하여,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신 두 마디의 설교는 효과면에서는 만점입니다. 그들이 즉시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기 때문입니다. 또한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에게,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막 9:25)는 외마디 설교 역시 만점짜리입니다. 귀신이 즉각 소리 지르며 나가 버렸으니까요.
  하지만 드물게는 최악의 설교도 있습니다. 그 설교를 들은 유태인들이 수군수군하며 반감을 표시했다니 어찌 성공한 설교이겠습니까.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하고 제자 가운데 여럿이 불평을 했던 설교인데 어찌 은혜 있는 설교이겠습니까. 그것보다 더 혹독한 비판으로 이어집니다. 설교의 결과가 다음과 같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 6:66). 만약 주일예배 설교를 듣고 100명 모이는 교회 성도들 가운데 50명이 우르르 나가버렸다면 그것이 바로 최악의 설교 아니겠습니까. 심지어 그 설교 들은 유태인들이 설교자를 살해하려는 음모까지 꾸몄다니까요. 그것이 무슨 설교냐고요? 요한복음 6장에 기록된 성만찬 설교입니다. 이 설교 때문에 초대교회에서는 예수쟁이들을 식인종으로 몰아서 죽였다지 않습니까? 최악 중의 최악 설교입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께서 그 역효과를 전혀 모르신 채 그런 설교를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작심하시고 그 설교에 목숨을 걸어 놓으셨습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영원한 생명의 길로 끌어 오시겠다는 작심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설교는 최악의 설교가 최선의 설교였다 바로 그것입니다. 당장은 최악의 설교였어도 오래 그리고 세상 끝날까지 그것도 온 인류에게 최선의 설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성만찬은 영혼을 가장 튼튼하게 만드는 ‘음식으로 된 설교’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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