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길영 목사(순복음시카고교회)

독일에 카이제르라는 유명한 황제가 있었습니다. 이 황제는 수염으로 유명합니다. 카이제르 수염하면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얼굴 양쪽으로 꼬부라져 올라간 수염을 말하는데, 그 사람이 아마 처음으로 그렇게 기른 듯합니다. 이 황제는 기독교 신앙이 돈독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루는 조금 심심했던지 신하들을 보고 묻는 겁니다. “얘들아, 내 몸값이 도대체 얼마나 나가겠느냐?” 내가 황제인데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가치가 있는 사람이 있겠느냐, 한 번 내 값을 매겨 봐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하들이 말을 할 수가 있어야죠. 도대체 얼마를 매길 수 있는가 말입니다. 공연히 말을 잘못했다가는 경칠 테니까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는 겁니다. “왜 말을 못하느냐, 한 번 매겨 봐라” 했더니, 한 젊은 신하가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황제님은 은 29냥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황제가 화를 내며 “아니 내가 금도 아니고 은 29냥이라고? 은 한 냥이 도대체 얼마냐?” 물었더니 그 신하는“황제님, 화내지 마시고 제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예수님이 은 30냥에 팔렸는데, 황제님이라고 예수님보다 더 나갈 수 있습니까?”라고 설명했습니다. 황제는 그만 머리를 숙이고 말았습니다. 황제는 장난 삼아 물었던 말 때문에 상당히 겸손해졌다고 합니다. 황제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비싼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은 30냥짜리도 못 된다고 생각하니,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사람의 생명은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절대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생명의 존엄성이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가족, 여러분의 자녀에게 누군가 값을 매긴다면 여러분은 참을 수 있습니까? 절대가치에는 사람이 가격을 매길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소유가 아니고, 생명을 만든 절대자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상품에는 가격이 있어도 작품에는 가격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이 생명의 가치를 알 때는 “내가 이것을 위해 죽을 수 있다”고 할 때입니다. 바로 그때 그 사람의 생명의 가치가 나타납니다. “나는 이것을 하다가 죽어도 좋다.” 그것이 그 사람의 생명의 가치를 나타냅니다.

알버트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에서 일생을 헌신했습니다. 그는 철학박사, 신학박사, 의학박사, 음악박사였습니다. 박사학위가 네 개입니다. 이분이 철학박사라고 하면 조금 의아해 합니다. 슈바이처 박사의 철학은 심오합니다. 그의 철학의 주제는 생명철학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 이것이 철학적으로 얼마나 가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뿐 아니라,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도 철학적으로 이 가치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철학의 기준에 의해, 먹지 못해 굶주리고 병들어서 고통당하고 알지 못해 무시당하고, 복음도 듣지 못한 아프리카 사람들을 찾아가서, “흑인인 너희는 배우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가난해도 하나님께서 나와 똑같이 주신 생명이다. 너희 생명이나 내 생명이나 똑같다.”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들에게 유명한 연주곡들을 들려 주고, 병을 고쳐 주면서, 56년 동안 그 철학대로, 신학대로 그들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나는 살려고 하는 여러 생명 중 하나로 이 세상에 살고 있다. 생명에 관해 생각할 때 어떤 생명체도 나와 똑같이 살려고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다른 모든 생명도 나의 생명과 같으며 신비한 가치를 가졌고 따라서 존중할 의무를 느낀다. 선의 근본은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보호하고 높이는 데 있으며 악은 이와 반대로 생명을 죽이고 해치고 올바른 성장을 막는 것을 뜻한다”라고 이분은 말했습니다. 이분은 신앙 때문에 생명에 대하여 깊이 깨달았고, 깨달은 대로 행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귀중히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떤 공사장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나요?” “나는 그저 먹고 살기 위해서 돈을 벌려고 일합니다.”다른 사람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나는 짐을 나르는 사람이오.”또 다른 사람에게 물으니 “나는 하나님과 가족을 위해 일을 합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마지막 사람은 다른 이들과 똑같은 일을 하지만, 자신의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벤허’라는 유명한 영화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로마의 함대 사령관 아리우스가 벤허가 타고 있던 갤리선에 부임했을 때, 그 배의 노를 젓고 있던 벤허를 위시한 모든 노예들을 향하여 “너희들은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몸들(condemned men)이지만 오직 배 때문에(to serve the ship) 살려 둔다. 그러니 열심히 노를 젓고 오래오래 살아라.”고 일장훈시를 합니다. 나중에 벤허가 아리우스 장군을 구출하여 뗏목 위에 같이 떠 있을 때, 아리우스가 왜 자기를 살려 주었느냐고 물으니까, 벤허 역시 “나도 배 때문에 너를 살려 둔다.”라고 재치있게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의 생명을 살려 두시는 겁니까? 이미 죄인으로서 지옥의 사형선고를 받았던 몸들을 왜 구원해 주시고 지금까지 생존하게 해주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생명이 아직 하나님의 일에 쓰일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사업에, 전도와 선교 활동에, 교회 봉사와 충성에 쓰여야 할 목적이 우리 인생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가치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어느 것보다 사람을 가장 귀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생명은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천하보다 귀중한 생명들이 얼마나 무가치하게 죽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전쟁으로 죽어갑니다. 전쟁은 많은 사람들을 살상합니다.

이제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생명이 있는 동안 기회가 있고, 생명이 있는 동안 생명연장을 위해서 일할 수 있고, 생명이 있는 동안 다른 생명을 위해서 일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생명을 위하여 땀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은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죽는 법을 아는 사람은 사는 법도 아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생명 존중을 깨닫고 나갈까요? 우리를 살리려고 생명을 지불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실 때 비로소 생명의 소중한 가치를 알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나의 생명을 사랑하듯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사랑하고, 나의 인격을 존중하듯 다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는 믿음의 역사가 우리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삶의 절대 절망을 이기시고 절대 희망을 주신 분이십니다. 그 절대 희망은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 희망인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주님과 함께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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