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길영 목사(순복음시카고교회)

『삶의 의미를 찾아서』라는 책을 쓴 빅터 프랭클이라는 심리학자가 있습니다. 이분은 유태인으로 2차세계대전 중 독일이 유태인을 학살할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까지 끌려갔다가 살아나온 사람입니다. 그가 여러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깨달았던 것은 아무리 열악한 환경이라도 삶의 의미를 찾고 희망을 가지고 있는 자는 쉽게 죽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희망을 포기한 자는 얼마 못 가 병으로 죽던지 가스실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특히 크리스마스 이후에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 이전까지는 무언가 내 인생에 변화가 오겠지 하고 기다립니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가 없자 희망이 사라지면서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희망을 잃는다는 것은 미래가 없다는 것이고, 이는 곧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정신의 장악력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정신이 흐트러지면 몸과 마음이 연약해지고, 결국 독일군들은 쓸모 없다고 가차 없이 가스실로 보냈다고 합니다. 빅터 프랭클은 아침마다 깨진 유리조각으로 면도를 했다고 합니다.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면도를 하면서 희망을 되살린 것입니다.  무슨 대단한 희망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살아서 가족을 보겠다는 희망, 빅터 프랭클의 경우에는 쓰다만 원고가 있었는데 그것을 반드시 완수하겠다는 희망 같은 것이었습니다.

희망이 얼마나 대단한지  설사그것이 착각일지라도 인간을 살아 있게 합니다. 사형수들이 갖는 희망 중에 ‘특사 망상’이 있습니다. 죽기 불과 몇 시간 전까지도 사형수는 누가 특사를 보내어 사형을 면제해 줄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이 희망마저 없다면 그는 사형장까지 걸어갈 힘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살을 시도하는 가장 큰 원인중 하나도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을 때입니다. 도무지 이 운명의 쳇바퀴에서 벗어날 가망성이 없을 때 자살을 시도하게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때로 어두운 밤을 만납니다. 어두운 밤하늘에 별조차 없다면 그 어두움은 힘들고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밤이 어두워도 하늘에 별이 총총히 빛나면 어두움을 어두움으로 느끼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이 아무리 어둡고, 괴롭고, 고통스러워도 별 같은 희망을 바라볼 수 있으면 절망은 아닙니다. 삶의 어두움과 함께 희망조차 바라볼 수 없으면 그때는 절망인 것입니다. 희망은 꿈을 낳고, 꿈은 사랑을, 사랑은 믿음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희망을 붙잡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희망은 너무 중요합니다.

단테의 『신곡』‘지옥편’에 보면 지옥문 입구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곳을 통과하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지옥은 달리 지옥이 아닙니다. 희망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리스 신화 중 하나인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도 희망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판도라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자입니다. 이 여자에게 신들이 상자 한 개를 주었는데, 이 안에는 인간을 괴롭히는 온갖 저주들이 다 들어 있었습니다. 신들은 이 상자를 주면서 절대 열어 보면 안 된다고 당부했습니다. 그렇지만 호기심이 강했던 판도라는 상자를 열었고 결국 그 안에 들어 있던 저주와 재앙이 다 빠져 나갑니다. 급하게 상자를 닫았는데 판도라는 딱 한 가지만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희망’이었습니다. 인간사에 여러 저주와 어려움과 환난이 있지만 인간은 이 ‘희망’이 있기에 살아갑니다. 사실 사람은 희망을 먹고 자랍니다. 그러나 인생을 결정하는 성공과 실패는 그 즉시 알 수 없습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어느 때는 회사에서 퇴직당한 것이 불행처럼 여겨졌지만 이 때문에 인생의 새로운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면 성공입니다. 어느 때는 성공처럼 보였던 일도 이 때문에 결정적인 불행을 자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인생을 속단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어떻게 인도해 가시나 하는 희망과 기대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희망이란 것은 당장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쉽게 희망을 붙잡지 못합니다. 유대민족은 보이지 않는 희망을 붙잡고 살아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은 늙고 생의 기반도 없고 친척도 없고 자녀도 없는 악조건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신앙 하나로 큰 민족의 조상이 된 위대한 사람입니다. 아버지 이삭을 사이에 두고 야곱과 에서가 서로 다투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이 다투는 이유는 오직 하나,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이삭의 씨를 통해 큰 민족이 되게 하여 가나안 땅에서 복의 근원의 삶을 살 것이라는 약속뿐이었습니다. 그 결과 받은 축복이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축복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장자권을 받았다지만 오히려 형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하여 그 위험만 커졌습니다. 그 때문에 고향을 떠나 먼 밧단아람으로 피신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야곱이 그토록 간절히 받고자 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희망이었습니다. 미래였습니다. 장차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셨던 그 약속을 받을 것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의 희망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희망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사람들은 모두 장차 주어질 하나님 나라의 희망 때문에 현재의 고난을 즐거이 감수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현재를 붙잡기 위해서 미래를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문제 속에 있어서 너무 힘드십니까? 해결이 되지 않아 너무 어렵습니까? 희망이 보이지 않아 답답하십니까? 당장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는 소리가 없어도 여러분, 희망을 붙잡으십시오. 환난은 희망을 꽃피워내는 터전입니다. 현재가 좋으면 미래를 희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재가 불편하고 힘들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희망을 갖게 되고 결국 그 희망대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불편하고 힘든 것을 원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불편하고 힘들어야 소망이 생기고, 삶을 바꿉니다. 밤이 되어야 별이 총총히 빛나는 것처럼 우리 인생이 어둡고 캄캄해질 때 희망은 더욱 빛나는 것입니다. 어두울 때에 빛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두운 밤에 별이 비추는 것처럼 우리의 삶이 어두울 때에 희망이 우리에게 비쳐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진정한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의 진정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갈보리산 십자가 위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의 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삶의 절대 절망을 이기시고 절대 희망을 주신 분입니다. 그 희망인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시대에 주님을 모시고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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