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생애를 두고 성공적인 삶이었는가 아니면 실패한 삶이었는가에 대한 주장이 만만치 않다. 이를 두고 교파가 갈리고 이단 종파가 생겨날 만큼 논쟁도 많았다. 어떤 이단 종파에서는 예수의 실패를 주장하며 교주인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종파도 있으며 새로운 메시아를 기다려야 한다는 주장도 난무한다.
인간의 성패를 판가름하는 기준에서 예수의 생애를 본다면 양면 모두 없진 않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으로부터 시작하여,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남자만 오천 명을 먹이신 일,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일 등의 초인간적, 초자연적 사건은 인간 역사상 전무후무했던 성공적 사건임이 틀림없다. 이러한 일을 축하하고 경외하던 군중은 그를 억지로 이스라엘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고, 예루살렘 입성 시에는 비록 작은 나귀 새끼에 몸을 얹기는 했지만, 대중은 왕을 맞이하는 대대적인 행사로서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흔들었으며 땅에는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깔기도 했다. 당시 추세로 보아도 그는 얼마든지 세상의 왕으로 군림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통치할 수 있었다.

그러던 그가 백팔십도로 바뀌어 자신이 불러 세운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는 한편, 원수들의 손에 끌려 다니며 온갖 조롱과 모욕을 당하고 눈까지 가리고 저질적 선지자 노릇을 강요당하는 한편, 얼굴은 침으로 범벅이 된 채 주먹으로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된 처참한 모습의 그를 보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어디 이뿐인가! 십자가에 매달려 맥없이 죽어가던 그의 모습에 원수들은 대승리를 거둔 것처럼 그를 향해 온갖 저주와 조롱을 퍼붓고 승전가를 부르며 축배를 들었던 일은 예수를 실패자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면 예수는 실패자란 말인가? 그렇다. 그 당시 현상과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수준과 조건으로 그는 분명 실패자임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던 그가 그토록 무력하고 처참하게 죽어가게 될 줄이야. 3년간 그의 뒤를 바짝 따르던 제자들마저 이해하지 못하고 불신 속에서 모두 도망치고 말았다. 그리고 이러한 죽음은 그에 대한 신앙이 들락 말락 하던 군중들의 더 없는 갈등과 증오를 사게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기에 그에 대한 조롱과 증오가 극에 달하기도 했고, 그 결과 그의 죽음은 인간이 사는 지상에서는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고 끔찍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의 생애가 참으로 실패한 것인가 말이다. 이미 말했거니와 세상적인 안목으로 보면 얼마든지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지금도 예수를 믿지 못하는 유대인들은 예수에게 저주받은 인생이자 배신한 선지자라는 낙인을 찍고 있다. 그러나 성경적인 측면에서는 그의 삶이야말로 참으로 완전한 삶이자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이룬 성공적 삶이었음이 분명하다. 예수의 유일한 사명은 “그들(우리)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는 것”(사 53:11)으로 그가 무력하게 찔림으로 우리의 허물이 가려지고, 그가 처참하게 상함으로 우리의 죄악이 없어지며, 그가 온갖 징계와 조롱을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릴 뿐만 아니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의 상처가 아무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사 53:5). 그러므로 예수께서만 가능하셨던 삶,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었던 그의 생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에 너무도 완벽하고 성공적인 삶이었다.
중요한 것은 믿는 자들의 삶에 대한 평가이다. 그들의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가시적으로만 정해질 수 없다는 점이다. 만일 어느 목회자가 수만 혹은 수십만 명의 교인을 확보하고 대형 교회를 이루었다고 해서 성공한 삶, 성공한 목회자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비록 세상의 눈으로는 부족해 보이고 가난해 보여도 그의 삶을 통해서 얼마나 하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었는가에 그 평가를 두어야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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