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짜리 교회(34)

바로 앞의 글을 “그런데 이렇게 직책이 없는 교회가 가능할까요?”라는 질문으로 마쳤는데, 이것은 필자가 지난 몇 년 동안 수도 없이 받은 질문입니다. 그것도 세미나에 참석해서 사흘 내내 성경이 말하는 교회에 관해 상세히 설명을 듣고 또 그 내용에 동의하기까지 한 목사님들로부터 주로 받은 질문입니다.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
하지만 이 질문은 아주 잘못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질문에는 “그런 교회를 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런 교회를 하겠지만, 가능하지 않다면 하지 않겠다”는 저의가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교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나는 하지 않겠다” 라는 반응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주님께 대한 도전입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가능하든 불가능하든, 되든 되지 않든, 지금은 잘 안 돼도 몇백 년 후에라도 되게끔 나 자신만이라도 순종해야지, 가능하냐 아니냐를 따지고 있는 것은 열매나 결과 위주로 신앙생활 또는 사역을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자기 만족을 위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가능하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옳으냐? 오늘날 우리가 하고 있는 교회가 옳으냐? 만일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옳다면 가능성을 따질 것이 아니라 되든 안 되든, 결과가 좋든 나쁘든 그런 교회를 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순종하는 것이 우리가 볼 때 잘 되는 것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이신 교회 곧 모든 지체가 제 기능을 발휘하며 몸을 이루는 유기적 교회에는 직책이 있을 수 없음을 신약성경이 말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런 교회를 해야 합니다. 현대 교회의 직책들(CEO가 경영하는 기업의 조직에 있는 직책 같은 것들)이 예수님의 역할과 지체들의 역할을 빼앗고 예수님과 지체들을 수동적인 구경꾼으로 전락시키기 때문입니다. 아니, 제도적 교회를 유지해야 하는 필요에 따라 예수님과 지체들을 활용한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심적으로는 동의하면서도(적어도 필자가 세미나에서 만난 많은 목사님들은, 그리고 아마 이 글을 읽어온 독자들 중에도) 왜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하지 않을까요?

옳아도 하지 않는 이유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여러 해 전에 한국 방문 중 지하철에서 목격한 이야기를 한 토막 소개하겠습니다. 저녁때쯤 지하철을 탔는데 빈 자리가 없어서 서서 가고 있는 필자 바로 앞에 젊은 청년과 60대로 보이는 노인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정거장에서 갓난아기를 안고 기저귀 가방을 든 여자가 타더니 필자의 옆에 와서 섰습니다. 그러자 필자 바로 앞의 그 젊은 청년이 갑자기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는 조는 체하기 시작했습니다. 방금 전까지 두 눈 멀쩡하게 뜨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얼마만큼 시간이 흐른 뒤 앞의 60대 노인이 참다 못해 일어나면서 아기 엄마에게 자리를 양보하자 그녀는 사양했습니다. “할아버지, 저 괜찮아요. 감사하지만 할아버지께서 그냥 앉아 가세요.” 아무리 아이를 안고 힘들게 간다고 해도 노인으로부터 냉큼 자리를 양보받을 정도로 뻔뻔한 대한민국 국민은 그리 많지 않은 게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그 노인의 강권에 못이겨 결국 그녀는 자리에 앉았고 노인은 필자의 옆에 서서 갔습니다. 그리고 재미 있는 것은, 아니 안타까운 것은, 조는 체하던 그 청년이 몇 정거장을 가는 동안 가끔씩 실눈을 뜨고는 그 상황을 엿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바늘방석이었겠지요.이것입니다. 옳아도 하지 않는 이유말입니다. 대한민국 사람치고 어려서부터 도덕 교과서나 부모님이나 선생님으로부터 “차를 타면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미덕이다”라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듣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청년이 그것을 알고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아마 하루 종일 일하고 퇴근하는 중이므로 상당히 피곤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기 엄마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옳다’ 라는 생각과 피곤한 다리 사이의 갈등에서 다리가 이겼을 것입니다. 옳은 길을 택할 것이냐 아니면 편한 길을 택할 것이냐의 기로에서 편한 길을 택하고 만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리만 편했지 마음은 몹시 불편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불안한 마음으로 실눈을 뜨고 엿볼 수밖에 없었겠지요. 혹시나 “예끼, 이 젊은 친구야. 나 같은 노인이 자리를 양보할 때까지 죽치고 앉아 있다니! 무슨 교육을 그 따위로 받았나?” 라며 그 노인이 자기를 꾸중하지는 않을까 가슴이 쿵쾅쿵쾅… 또 그 주위에 있는 다른 모든 승객들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옳아도 하지 않을 때의 합리화 작업
하지만 그 청년은 그래도 줄곧 앉아 있었습니다. 모르긴 해도 아마 마음 속에서 자신이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이유를 대며 합리화 작업을 끊임없이 진행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하루종일 너무 피곤하게 일했기 때문에 일어날 기력조차 없다,” “만약 자리를 양보했다가 내가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므로 앉아서 가는 것이 오히려 그들을 위하는 길이다. 그러고 보면 나도 노약자에 속한다,” “나는 자는 체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졸려서 잠이 드는 중이다,” “자리를 양보한 저 노인은 하루종일 노인정에서 편히 쉬고 놀았을 것이므로 건강상 서서 가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저 아기 엄마는 지하철만 타면 상습적으로 젊은 사람 앞에 가서 서는 얄미운 타입의 여자처럼 생겼으니 오늘은 임자 만나서 좀 당해 봐야 한다” 등등.모든 선택엔 크건 작건, 옳건 그르건 대가 지불이 따릅니다. 위의 청년은 다리가 편한 길을 선택하면서 마음은 몹시 불편하게 되는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선택엔 그 선택을 뒷받침할 정당한 근거가 있든지, 아니면 위의 청년이 마음 속으로 했을 법한 합리화시키는 작업이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에 동의하면서도 그런 교회를 하지 않는 사람들의 선택에도 이것은 그대로 적용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택은 위의 그 청년의 경우와는 달라서 훨씬 더 쉽습니다. 적어도 겉으로는 대가 지불을 거의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위의 따가운 시선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따갑기는커녕 절대다수가 같은 선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좀 안심이 됩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제도권 교회에 신약성경의 구절들을 갖다가 “proof text(성경 본문을 증빙자료로 사용하기)”로 맞추면 얼마든지 들어맞기 때문에 너도 나도 신약성경적 교회를 하고 있다고 자위하게 됩니다. 물론 어떤 내용들은 좀 켕기게 하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그 정도의 내용 가지고는 절대다수가 같은 길을 가는 대세에는 별로 영향을 끼치지 못하니 안심이 됩니다. 그 같은 길을 간 절대다수에 마틴 루터, 존 캘빈, 존 웨슬리, 드와이트 무디, 빌리 그레이엄 같은 거장들도 있고, 내가 존경하는 기라성 같은 아무개 목사님도 있기 때문에 덩달아 안심을 하곤 합니다.

이것은 마치 필자가 40년 전 고등학교 다닐 때 중간고사 성적 발표 후에 낙제 점수를 받고도 안심되었던 상황과 비슷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중간고사 시험문제가 하도 어려워서 반의 3분의 2 이상이 모조리 낙제 점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중에 반의 임원도 있었고, 평소에 공부를 꽤나 한다는 친구도 있었기에 더욱 안심이 되었습니다. 낙제한 학생들이 절대다수였으므로, 담임선생님도 그들을  위한 개인 면담이나 학부모 면담 같은 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점수를 올려 주지는 않았습니다. 다음 학기말 고사를 잘 치르지 않으면 낙제를 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잠깐 안심이 되기는 했지만 패스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약성경이 말하고 있는 교회를 하지 않는 것도 이런 상황이 아닐까요? 대세를 따라가니 안심은 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지지해 주실 수 없는 상황.

합리화를 넘은 착각 현상
그런데 필자가 얘기하는 신약성경이 말하는 유기적 교회를 하지 않는 데에는 안심 정도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는 당위성 비슷한 게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기독교 역사의 주류가 그래왔고 지금도 대부분의 신학자나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제도권 교회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같이 평범한 사람이 아무리 글을 쓰고 세미나를 하고 아우성을 쳐도 신약성경이 말하는 유기적 교회를 위해 직책으로서의 목사를 그만두겠다는 사람은 가물에 콩 나듯 하고, 그런 교회를 찾겠다는 교인들은 만나 보기가 더 힘듭니다. 신학으로, 교리로, 온갖 것들로 현대 교회의 틀을 정당화시키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도무지 하나님의 마음과 목적과 필요에는 관심이 없고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는 데에, 즉 사람을 위한 교회에 올인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크나큰 착각입니다. 드레스덴 제임즈라는 사람이 다음과 같이 한 말을 교회의 문제에 있어서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실이 등장했을 때 초기의 동요는 거짓이 얼마나 믿어졌느냐에 정비례한다. 사람들을 뒤흔들어놓은 것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 아니라, 지구가 평평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잘 포장된 거짓투성이가 세대를 이어가며 서서히 대중들에게 먹혀들어갔을 때, 진실은 전적으로 터무니없어 보일 것이고 그것을 말하는 사람은 형편 없는 미치광이처럼 생각될 것이다.

십여 년 전 필자가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고 복음을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면서 그동안 얼마나 속아왔는지 한탄했던 것, 그리고 신약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여기 저기서 외쳐봤지만 공허한 외침이었고 외톨이되기 딱 맞는 신세였던 것을 드레스덴 제임즈의 말이 대변해 주는 듯합니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 즉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낳으신 자녀들의 집합체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이시고 그분의 생명을 받은 지체들이 몸을 이루는 유기체이므로 직책이나 조직이나 그 어떤 틀로 생명의 흐름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머리와 지체의 역할을 빼앗아 가는 현대의 목사라는 직책과 사업체 운영식의 시스템이 사라지기 전에는 유기적 교회는 세워질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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