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뉴질랜드라고 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께서 에덴 동산을 옮길 때 그 한 부분을 남긴 것이 뉴질랜드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뉴질랜드에는 사나운 짐승이 없다고 합니다. 사자와 호랑이, 이리 같은 사나운 짐승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뉴질랜드에선 양을 칠 때 목자가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산과 들에 내버려 놓으면 양이 스스로 먹고 자고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뉴질랜드에는 희한하게 큰 뜸부기나 키위 등 날지 못하는 새가 다섯 종류나 있다고 합니다. 새는 새인데, 날개도 근사하게 달렸고 색깔도 좋은 새가 날지 못하고, 나뭇가지에 기어 올라가고 땅에서 걸어 다닙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위협하는 짐승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우도, 족제비도, 사자도, 곰도 없기 때문에 날아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알에서 깨어난 이후로 날아본 적이 없습니다. 걸어만 다니니까 그만 날개가 퇴화해서 날지 못합니다. 또 나는 데 무관심합니다. 무엇 때문에 나느냐, 날 필요가 없는데. 서서히 다니면서 먹이만 찾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도 그와 같을 때가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활동하지만, 편안해지면 게으름의 찌끼가 끼어서 부지런하지 못합니다. 부지런히 일하면 탐욕이 들어올 시간이 없습니다. 게으르고 편안하기 때문에 나중에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고난은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찌끼를 없애고 냄새를 없애고 향기롭게 만듭니다. 고난당하면 회개하게 됩니다. 평안할 때 누가 회개합니까? 고통스러우면 누구든지 회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우리를 회개시키는 변화를 가져옵니다. 시련을 당하면 사람들이 긴장하고 열심을 내지만, 시련 없이 평안해지면 긴장을 놓아 버리고 게을러지지 않습니까? 고난당하면 반성하게 됩니다. 고난당한다는 것은 옛 습관을 벗어 버리고 새로워지라는 것입니다. 삶의 캄캄한 터널을 지날 때 사람은 변화 받습니다. 평안하고 좋을 때 변화 받지 않습니다. 삶의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 변화를 받고 새 사람이 되어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은 우리를 반성시키는 기회입니다. 고난 받을 때 깨어집니다. 그릇은 깨어지면 못 쓰지만 사람은 깨어져야 쓰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원치 않지만 우리의 삶에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신앙인은 어쩔 수 없이 축복과 고난을 먹어야 합니다. 축복과 고난의 비빔밥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밥 따로 반찬 따로보다는 축복도 받고 고난도 받는 비빔밥을 먹어야 합니다. 고난만 계속 주면 낙심해서 나자빠지고, 축복만 계속 주면 게을러져서 하나님을 떠나게 되니, 하나님은 축복과 고난의 비빔밥을 먹일 수밖에 없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신앙의 비빔밥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고난당할 때는 하나님이 축복의 희망을 준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고난 속에 축복의 은총의 손길이 있어 고난당할 때도 축복의 비빔밥이 되는 것입니다.

식물학자의 말에 의하면, 겨울이 지난 후에 춘삼월이 다가오면 강한 바람이 불어온다고 합니다. 춘삼월 꽃샘추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 왜 바람이 불까요? 겨울 동안 잠에 푹 빠진 나무는 춘삼월이 와도 뿌리에서 물기를 끌어 올리거나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 맺을 생각을 안합니다. 나무를 잠에서 깨우는 것이 바람입니다. 바람이 나무를 뿌리째 흔들어 놓으면,“어~ 벌써 봄이 왔느냐?”하고  잠에서 깨어나“아유, 이제 물기를 빨아 올려야 되겠다. 싹을 튀워야겠다. 잎도 피우고 꽃도 피워야 하겠다.”면서 뿌리가 활동을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무가 다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무풍지대에 있으면 잠들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평안과 환난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축복받을 때 방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안주하면 고난의 바람이 불고 가시밭길을 걸어가게 된다는 것을 끊임없이 깨우쳐야 합니다. 고난당할 때 회개하고 희망을 굳게 붙잡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얼마 안 가 축복을 주신다는 것도 깨달아야 합니다. 존 번연은“시험과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고난의 언덕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반드시 고난의 언덕이 있습니다. 기독교를 십자가의 종교라고 합니다. 십자가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골고다 언덕길을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너무나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채찍에 맞아서 힘이 없는 가운데 쓰러지고, 가까스로 일어나고 또 쓰러지면서 골고다 언덕길을 걸어갈 때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가는 길에는 이렇게 고통의 언덕이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십자가 위의 죽음이 있습니다. 골고다 언덕 길, 갈보리 언덕 길 다음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왜 죽어야 했습니까? 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기 때문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습니다. 누구나 죽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우리도 십자가 위에서 죽어야 합니다.

죽음 다음에는 무덤이 있습니다. 무덤에 묻히면 침묵입니다. 무덤 속에선 잘난 척도, 명예도, 남이 나를 알아 주는 것도 모두 조용합니다.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는 것을! 십자가 위에서 주님과 함께 못 박히고,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요? 무덤은 침묵이고, 세상에서 보면 절망이지만, 그 무덤 속에서 부활이 잉태되고 있습니다.

이제 부활의 찬란한 영광이 있습니다. 하지만 부활이 오기까지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고난의 언덕과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과 무덤입니다. 그런 다음에야 부활의 찬란한 영광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능력과 권세와 능력을 필요로 하면서 부활 이전의 것을 가볍게 여기지는 않는지요? 십자가 없는 면류관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부활이란 단어가 태어나기 전에 죽음이란 단어가 먼저 태어났습니다. 죽음 없는 부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죽음도 무의미합니다. 고난과 죽음 다음에 부활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축복과 더불어 고난이 오고, 고난이 왔는가 하면 또 축복이 오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을 반드시 알고 굳세게 서길 바랍니다. 다들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까? 고난을 이기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십시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나아가면 예수님께서 나를 인도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소망을 가지고, 오늘의 힘든 환경을 이기고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