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하지 않게 교통사고의 가해자가 되어 심리적, 경제적 손실을 입은 성도의 가정을 심방할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말씀과 말로 그를 위로하고 마음을 격려해야 하나 고민하는 중에 문득 한국의 모 방송국 프로그램이 생각났습니다. 

인기있는 개그프로그램중에 “친한 친구”라는 코너가 있습니다. 불행한 일을 당한 친구에게 두 명의 다른 친구가 찾아와 위로하는 과정중에 일어나는 해프닝을 코믹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 코너가 웃음을 자아내는 이유는 방문한 친구들의 어이없는 말과 행동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망해서 문을 닫기로 한 친구에게 와서 음식을 더 달라느니,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느니, 버릴 거면 자기들에게 달라는 등의 말을 합니다. 두 명의 친구는 말 그대로 친구가 아니라 웬수짓을 합니다. 배려심없는 우정과 경우에 합당하지 않은 말들이  가까운 사람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를 풍자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심각한 심방의 순간에 개그 프로그램이 생각 난 이유는 아마도 나도 그렇게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인 듯합니다.  목사이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발생한 곳에 찾아갈 일이 많습니다. 그 중에는 지혜로운 말이 바로 생각나지 않는 난처한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자살한 성도의 유가족들, 본인의 잘못으로 인해 감옥에 갇힌 성도, 장사가 안 되어 문을 닫는 가게의 주인 등을 찾아갈 때는  정말이지 성령님의 특별한 도우심이 기대됩니다. 

혹시나 위로와 권면을 위해 갔는데 위로는커녕 상대의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고 부담스럽게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목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간 사람의 방문이 상대에게 손님 접대의 부담감을 주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인용하여 권면하는 설교가 죄책감을 가중시키거나 감동도 도움도 안 되는 쓰레기 충고가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욥기에는 고난당하는 욥과 그 친구들의 대화가 실려 있습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속사정도 모르면서 도움 안 되는 조언을 남발하는 친구,  상황은 알지만 애정보다는 비판의 칼날을 더 세게 들이대는 친구, 도움이 아니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더 큰 부담을 주는 친구들을 볼 수 있습니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친구를 어렵게 만드는 일은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친한 친구가 아니라 선한 친구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올바른 위로자, 따뜻한 조언자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뭔가 그럴 듯한 말을 해주겠다는 의욕을 접고 듣는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담학에서는 공감적 경청이라는 말을 강조합니다. 감정을 헤아리고 공감하며 듣는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사실관계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나 조언보다 더 중요한 상담기법은 감정을 읽고 듣는 능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마음과 감정을 읽어 주고 함께 느껴 주는 것은 효과적인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풀리면 문제를 풀어갈 능력을 스스로 찾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친구가 필요한 친구들이 참 많습니다. 선한 이웃이 필요한 이웃들도 많습니다. 그들에게 선한 친구, 선한 이웃으로 다가가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해 봅니다. 선한 목자가 되어야 할 이유도 똑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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