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싸고, 짐을 풀고 (2)

“만일, 만일에 말입니다. 연합국들이 준비하고 있는 동안 이쪽에서 아주 이겨 버리면 어떡합니까?”
그는 계속 물었다.
“연합국들이 일본, 독일, 이탈리아를 추월하기 위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나도 몰라요. 그러는 동안에 무슨 일이 날지도 알 수 없구요. 그러나 나는 우리편 사람들의 정신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전쟁을 오래 끌면 연합국들은 승리할 때까지 절대로 중단하지 않을 거예요. 우리는 때가 되면 돌아올 겁니다.”
그러나 누가 루스벨트와 스탈린의 꿍꿍이속을 미리 알 수가 있었을까? 이 두 사람이 처칠에게 압력을 넣어 얄타 회담을 가졌고, 그 결과 한국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한국의 반쪽을 소련의 공산주의자들에게 내 주리라고...
선교사들이 두 번째로 짐을 쌌더니 당국은 이번에는 또 동경 협상 때문에 몇 주일이 더 늦어진다고 했다.
Dr. 머레이는 평상시의 근무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다시 풀었다. 그들은 단지 출발 날짜가 지연된 것일 뿐 계획 자체가 취소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얼마 동안을 지체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고 또 Dr. 머레이는 그들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거짓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강제 추방

2~3주가 지났을 때 헌병대에서는 추방당하는 선교사들이 1942년 6월에 떠나게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웃의 친구들을 불러 송별연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겠다고 했다. 송별연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피해가 없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 말은 사실로 믿기 힘들 정도로 반가운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들은 약속한 대로 해주었다.
헌병들과 교체된 한국인 경찰 한 사람은 항상 너그러웠다. 그는 송별연에 감시자로 나와서는 가장 구석진 자리로 가서 일부러 잠을 자는 척하여 집회가 끝날 때까지 참석자들을 편안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다음 날 아침, 어제 감시자로 나왔던 그 경찰관이 함흥 선교부 선교사들의 인솔자로 나왔다. Dr. 머레이는 가방 두 개를 짐꾼에게 지워 기차역으로 나갔다. 한국인 경찰은 이때에도 일부러 선교사 앞에 걸어가면서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길에서 선교사들에게 인사하려는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주지 않으려는 세심한 배려에서였다.
추방당하는 선교사 일행이 병원 문 앞을 지나갈 때 모든 한국인 의료진 간부들과 직원들, 그리고 병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환자들은 문 앞에 나와서 떠나가는 Dr. 머레이 일행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들은 감히 기차역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Dr. 머레이가 작별 인사를 했을 때 모든 사람들의 뺨에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우리들이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또는 우리들 중 누구에게 어떤 불행이 닥칠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한국인들은 선교사들이 감옥에 수용될 것이라고 두려워했고, 선교사들 또한 한국인들이 앞으로 어려운 시기를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차역에 도착하니 Dr. 머레이의 첫 번째 한국어 선생이었던 Dr. 안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스코트씨의 후임으로 남학교의 교장이 된 김눙군 장로가 나와 있었다. 서로들 한 마디의 말도 나누지 못하고 아는 척도 하지 못했으나 그들이 마지막으로 송별을 하기 위해 나와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남쪽으로 (서울로) 가는 열차에 오른 Dr. 머레이는 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덜컹 소리와 함께 함흥역을 출발할 때부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여 함흥의 만용산이 그녀의 시야에서 안보일 때까지 두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소리 없이 흐느껴 울었다. Dr. 머레이가 강제 추방을 당하던 날 열차에서 바라본 함흥은 뿌옇게 젖어 있었다.
“주여, 저들의 고통을 기억하소서. 가난과 질병과 억압의 사슬에서 풀려나게 하소서. 저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소서. 저들의 눈물을 닦아 주소서. 함흥을 축복하소서. 코리아를 축복하소서! 저들 곁으로 (나를) 다시 보내 주옵소서...”
그녀는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캐나다 고향집으로 돌아갔다.

진주만 폭격

1941년 12월 7일 7시 55분에 일본 해군 전투기 183대가 오아우(Oahu) 섬에 있는 미군기지를 폭격하였다. 미군전투기의 반격을 차단하기 위하여 전투기와 항공기들을 폭격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진주만에 정박해 있는 미군 태평양 함대를 폭격하였다. 100척의 함정들과 일곱 줄로 늘어서 있던 전투함정들을 공격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애리조나 함정이었다. 이 함정에서는 1,177명의 수병이 사망하였다.
이 사망자 수는 오아우 섬 전체 사상자의 절반에 해당하는 것이다. 같은 날 8시 54분에 가해진 두 번째 공격에서는 171대의 일본 전투기가 날아와서 폭격하여 많은 피해를 입혔다. 진주만 폭격으로 394대의 미군 전투기가 훼손되었고, 188대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폭격에서는 민간인 68명을 포함하여 2,403명이 사망하고 1,178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행해진 일본 전투기의 진주만 폭격은 이때까지 제2차 세계대전에 개입하지 않고 있던 미국을 본격적으로 전쟁에 개입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진주만 폭격이 있은 후 2시간도 되지 않아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 국회에서 ‘치욕의 날’이라는 연설을 하고 미 의회는 한 시간 내에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일본의 진주만 폭격은 승산 없는 경솔한 도전이었다. 진주만 폭격은 역사의 방향과 일본의 비극적인 운명을 결정짓게 되었고, 일본으로서는 자기 무덤을 파는 돌이킬 수 없는 과오였던 것이다.

도쿄(Tokyo) 폭격

진주만 폭격 후 도쿄에 대한 미 공군의 첫 번째 폭격은 4개월 후에 있었다. 미 공군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도쿄 폭격을 감행하였다.
1942년 4월 18일 B25기 16대가 혼슈(Honsu) 동쪽 650마일 밖에 정박하고 있는 항공모함 호넷트(Hornet) 함에서 출격하였다. 두 번째 폭격은 1944년 11월 24일에 있었다. 이번에는 B29가 출격하였다. B29는 더 많은 폭탄을 싣고, 먼 거리를 비행할 수 있는 신형 폭격기였다. B29가 도쿄 외곽에 있는 나카지마 전투기 제작 공장 등에 폭격을 시도하였으나 군수품 공장들이 주택가에 있었으므로 목표물을 폭격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1945년 2월 23일에는 B29 172대가 출격하여 도쿄 시가지를 폭격하였다. 그 후에 3월 9일과 10일에는 B29 300대가 보다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폭격을 하기 위하여 야간에 출격하여 저공비행으로 도쿄 시내와 군수품 공장을 90분 동안 집중 폭격하였다.
이 포격 당시 도쿄 시내 건물 4분의 1이 불에 타고, 26만 7천 호의 건물이 파괴되고, 강물이 끓어오르고, 창문이 녹아내리고, 하늘이 빨갛게 타오르고, 13만 명이 사망하고, 1만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100만 명이 집을 잃었다고 한다. 이때 B29기 300대가 투하한 폭탄의 무게가 총 1,727톤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은 B29를 막아낼 힘이 없음을 자인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국력의 한계점도 깨닫게 되었다. 고이소 내각은 전쟁 종결을 위하여 중국인 무관을 통하여 장개석(蔣介石) 정부와 접촉을 시도하다 시게미스 외상과 육군측의 반대로 무산되고, 일본 안에서는 항전파와 화평파로 분열되어 심각한 대립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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