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에게도 원수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우선 사탄이 그 두목이었습니다. 기회만 되면 예수님을 짓부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가장 잘 위하는 척했습니다.
  “이 돌들에게 명령해서 빵이 되게 하시오. 자신의 굶주린 배는 물론 백성들의 먹거리를 당장에 해결할 수 있지 않소? 그렇게 되면 삽시간에 모든 백성들의 영웅으로 추앙받게 될 거요.”
  마치 예수님 영웅 만들기에 생명이라도 바치려는 충성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거기에 날카로운 낚시 바늘이 감춰져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온 인류의 죄악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려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단박에 무효화시키려는 음모입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대적하는 것은 그것 한 방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평생토록 집요하게 괴롭혔습니다. 어떤 때에는 헤롯왕의 모습으로 아기 예수의 목을 자르려 했습니다. 어떤 때는 바리새파나 사두개파라는 유태교 모자를 쓰기도 했습니다. 대제사장이나 성경학자의 칼을 가지고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로마 총독 빌라도의 손을 빌어 예수님을 십자가 위에 처형합니다.

  아 참, 가룟 사람 유다를 빼놓을 뻔했네요. 예수님과 같은 집안 출신이고 특히 경영에도 지혜가 많은 사람이었지요. 그래서 심복처럼 믿고 돈 관리를 맡겼는데 바로 그 녀석이 스승을 팔아먹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요 13:2).
  예수님의 원수들은 더 많은 곳에 있었습니다. 삼십 년을 함께 살면서 고운 정 미운 정 다 들었던 나사렛 사람들도 예수님을 낭떠러지에 밀어뜨려 죽이려 했으니까요. 심지어 예수님의 동생들조차도 맏형이 하는 일에 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눅 4:29; 요 7:5).

  하지만 예수님의 진짜 원수는 몸 바깥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몸 안에 있는 원수들이 더 무서웠습니다. 그것을 성경에는,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마 26:38)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 몸 안에서 격렬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하늘 아버지를 배신하고 자기의 육체적 생존을 선택할 것이냐 아니면 자기 자신을 죽이고 아버지의 뜻을 따를 것이냐의 투쟁입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길고 긴 투쟁을 해야 했습니다. 만약 그 때 그분께서 자기 자신이라는 원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면, 기독교는 그것으로 끝장났습니다. 하지만 이기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로 결론내셨습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이 여럿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 그것도 매우 중요한 하나는 바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건 격렬한 투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배신하려는 자기를 반드시 작살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기름짜기’ 언덕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걸 ‘겟세마네 대첩’이라고 부릅니다. ‘겟세마네’는 기름을 짠다는 뜻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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