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은 말년에 “다 나를 해롭게 한다.”고 비통해 합니다. 반면에 요셉은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창 50:20)고 말합니다. 비극과 시련이 야곱에게는 목을 짓누르는 맷돌이 되고, 요셉에게는 도약의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왜 아버지와 아들이 이렇게 다릅니까? 우연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축회사 사장이 아들에게 집을 짓게 했습니다. 아들은 부실공사를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집을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아들은 부실공사 주택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야곱과 요셉은 부자간이었으나 인생을 건설하는 태도가 서로 달랐습니다.
인생의 결말은 그 시작이 좌우합니다. 야곱은 형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세상에 나왔습니다.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욕심을 채우는 사람이라는 암시입니다. 믿는 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결국 야곱은 “다 나를 해롭게 한다.”고 말하게 됩니다.
야곱은 형과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야곱은 배신과 속임수를 심고, “다 나를 해롭게 한다.”는 낙담을 거두었습니다.

사실 야곱은 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롬 9:11-13). 그러나 타고난 혜택이 있어도 바른 응답을 못하면 낭패를 봅니다. 야곱은 장자의 명분 곧 상속권도 차지했습니다(창 27;18,  28:13).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신 특권도 믿음으로 받아야 참 내 것이 됩니다.
야곱은부자였습니다(창  30:43, 31:18) 그러나 재물이 평안을 주지 못했습니다.
야곱에게는 많은 특전과 혜택이 있었으므로 그 말년도 행복했을 것 같지만, 반대로 “다 나를 해롭게 한다.”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지레짐작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듭니다.
곤경을 만날 때, 지레짐작하고 단정하면 문제가 더 복잡해집니다.

야곱은 지레짐작으로 아들 요셉과 시므온이 죽은 줄 알았으나(창 42:36). 그들은 살아 있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이 욥을 미워하셔서 시련을 주셨다고 지레짐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과 위대하심을 발견했을 때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야곱은 “다 해롭게 한다.”고 했으나 사실이 아닙니다. 지레짐작하고 섣불리 단정하면 안 됩니다.
과거를 잘못 보면 미래도 잘못 봅니다. 벤야민도 애굽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형제들의 말에 야곱은 “벤야민도 뺏아 가려느냐?”며 질겁합니다(창 42;36).
현재를 과거의 색깔로 칠하기 쉽습니다. 어제 불행했으니 내일도 불행하리라는 단정은 잘못입니다. “다 나를 해롭게 한다.”는 야곱의 말도 오판이었습니다.

요셉과 야곱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요셉은 꿈꾸는 자요, 야곱은 책략가였습니다. 야곱은 가족을 속이고, 요셉은 가족을 구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를 기만했으나 요셉은 복종했습니다. 결국 야곱은 낙담하고, 요셉은 행복했습니다. 야곱은 전전긍긍하고 요셉은 만사형통이었습니다.
요셉에게는 불이익도 기회였습니다. 형들의 시기를 받고 앙심을 품을 수 있었으나 시련에도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확신으로 견디었습니다.
구덩이에 던져졌을 때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었으나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노예가 되어 고독과 좌절에 빠질 수 있었으나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고, 충성을 다했습니다.
여자 때문에 죄수가 되었습니다. 유혹의 순간에도 도덕성과 순수성을 지켰습니다. 하나님께 득죄하지 않았습니다.

옥살이를 오래 하며 낙심할 수도 있고 모두를 원망할 수도 있었으나, 한결같이 봉사하며 기다렸습니다.
요셉은 기구한 인생의 주인공입니다. 그러나 그의 시련은 승리로 가는 길이요, 고난은 발전의 도구요, 원수는 기회였습니다. 고로 요셉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창 50:20).
요셉은 어떤 인품의 소유자였습니까?  요셉은 성실했습니다. 아버지와 형들에게는 물론 상전에게도 성실했습니다.
요셉은 용서했습니다. 그릇이 작은 사람은 못하는 일입니다.
요셉처럼 성실하고 용서하는 사람에게 열매와 보상이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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