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예수를 제대로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에 대해 제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았습니다. 그 동안의 답은 “바르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늘 제 대답은 그리스도인다운 윤리를 지키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기준으로 제 자신을 들여다 볼 때, 저는 늘 기준 미달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설교한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이 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목회자로서의 부담이었습니다.

믈론 설교라는 것이 제가 도달할 수 있는 기준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고, 교회가 함께 추구해가야 할 이상을 선포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자신이 설교한 대로 살지 못하기에 늘 부끄러운 것이 목회자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처럼 “너희는 나를 본 받으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를 수 있기를 수없이 꿈꾸어 보았습니다.

김진홍 목사님의 묵상편지에 있는 글귀가 제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행복을 누릴 줄 알아야 예수를 제대로 믿는 거다” 나는 예수 때문에 행복한가? 정말 행복한가? 몇 번씩 제 자신에게 되물어 보아도,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 때문에 정말 행복했으나 습관의 무게에 짓눌려 행복을 잘 느끼지 못하고 있으며, 지금 이대로는 예수로 인한 기쁨이 그동안 살면서 겪어왔고 앞으로도 겪어야 할 상처투성이의 삶 너머로 뻗어나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 예수 때문에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예수 때문에 행복할 수 있어야 내 영이 힘이 있고, 예수 때문에 행복할 수 있어야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 수 있고, 목사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내면의 상처는 우리의 영혼을 부정적으로 감염시키는 바이러스와 같습니다. 그래서 상처를 꼭 끌어않고 있으면 더 크게 덧나나 봅니다. 나중에는 그 상처 때문에 삶을 지탱할 수 힘마저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서 작은 감동이 일어나고, 기쁨이 생겨나기 시작하면 상처가 아물기 시작합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평화가 일기 시작하면 그토록 우리를 아프게 했던 내면의 상처가 우리 안에서 더 이상 요동을 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작은 감동과 기쁨과 평화는 우리의 내면의 상처로 인한 부스럼을 치료하는 연고와 같습니다.

사도 바울의 주옥 같은 조언들을 떠올려 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라.”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받은 상처로 힘들어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우리의 삶의 중심에서 밀려나 있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이유삼아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께 우리의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지도록 내어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자신의 처지가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면서 쓰라린 마음을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무런 답이 없는 데도 말입니다.

요즘은 “야베스의 기도”라는 찬양으로 위로를 받습니다. 조성모라는 가수가 불렀던 찬양인데 개인적으로 이 찬양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나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 벗어나 근심 없게 하소서. 성령의 충만을 가득히 부어주소서, 오늘 내 삶 속에, 능력에 주님 손길로 나의 사는 날 그 모든 순간을 주님의 힘으로 채우소서” “나로 환난 벗어나 근심없게 하소서” 이 구절이 왜 그렇게 절실하게 감동이 되는지, 요즘 한참을 중얼거리고 있습니다.

요즘! 제가 씨름하고 있는 것은 복음의 감동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감동하며 살고, 성령의 위로하심을 만끽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야 살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처럼 거침없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인가? 예수님처럼 거침없이 사랑하고, 거침없이 이해하고, 거침없이 희생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제게 성령의 충만이 필요합니다.
우리 인생의 최대의 적은 두려움인 것 같습니다. 실패할 것 같은 두려움, 해를 당할 것 같은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누구나 이기적으로 변하고, 다른 사람에게 쉬이 상처를 주고, 자신들이 받은 상처를 과장합니다. 우리가 건강하게 살려면 이 두려움의 감정을 차단하고,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의 감정을 잘 극복한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과 같이 숱한 위협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만은, 다윗은 이러한 두려움의 감정을 잘 극복하고 위대한 인물로 우뚝 선 분입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직면한 두려움의 문제를 자신의 기질로 극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적으로 극복했습니다. 믿음으로 극복한 것이지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을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다윗처럼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확신만이 우리 인생의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늘 저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말씀은 스바냐 3장 17절의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는 구절을 가만히 회화적으로 그려보면 부모가 어린 자녀를 보며 좋아서 어쩔줄 모르는 모습이 연상됩니다.

우리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처음으로 그 아이들과 눈을 맞추었을 때, 그 아이들이 처음으로 엄마! 아빠! 하고 불렀을 때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감동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아이가 울면 달래 주고, 안아 주고 업어 주면서 콧노래를 부르곤 했습니다. 그때 저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노래도 만들어 주었습니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무훈이를 영원토록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예현이를 영원토록 사랑해요!” 지금도 생각만 하면 마음이 흐뭇해집니다.

이런 마음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마음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을 잊고 산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 이 말씀이 믿기 힘들어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라는 물음 때문이지요. 이 물음에 신학적으로 대답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적어도 성경을 붙들고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잊지 말아햐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우리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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