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본능적으로 우리의 삶을 편안하고 안전하게 지켜 주시는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반이 견고하고 튼튼해서 우리가 그 위에 서 있기만 하면 우리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 주시고, 우리가 계획하는 대로 우리의 삶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길 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우리의 삶을 평안하게 지켜 주는 안전장치로만 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도전하고 계시고, 우리를 모험으로 이끄시고, 우리에게 순종과 복종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제로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 마치 보험에 가입하듯이 교회에 나와 예배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면 좋고, 안 그러면 말고 하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의 편안한 삶이 위협받을 때에는 꼭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 라고 질문합니다. 자신의 삶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하나님을 믿고 따르려고 하기 때문에 순종이나 희생, 시련이나 고통을 감내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이런 우리의 고정 관념에 도전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맨처음 불렀을 때, “너는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라고 하는 정처 없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하여 아브라함을 불러냈습니다. 아브라함이 불확실한 미래를 향하여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거의 불가능이라고 생각했던 약속의 자녀 이삭을 100세에 얻었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엄청난 복의 통로였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새로운 도전이 그의 노년에 다시 시작됩니다. 이번에는 약속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성취하신, 이 약속의 아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이 아들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서원하는 것이 아니라 모리아 산에서 죽여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당시의 제사는 제물을 죽여서 배를 가르고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내장을 꺼내고, 살을 각을 떠서 불사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자비한 방법으로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비극적이고 불합리한 명령이 아브라함에게 내려진 것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신앙은 극도의 한계선까지 도전을 받은 셈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어쩌면 아브라함에게 이런 물음이 저절로 솟아났을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는 말인가? 이렇게 제물로 삼을 거라면 뭐 하려고 그토록 장황한 약속을 하시고, 기어이 아들을 주었다는 말인가? 왜 당신이 한 약속을 스스로 깨뜨리시는가? 이 자식이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의 상징인데, 이 아들을 바치면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밤새 여러 가지 질문이 일어났겠지만 아브라함은 말없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로 결단합니다.

번제에 쓸 장작을 이삭이 지게하고, 아브라함은 불과 칼을 들고 모리아 산으로 올가가는 중에,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한 이삭이 자신의 운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버지,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로 쓸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질문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쓰라린 가슴을 안고 마음 속으로 이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아들아! 실은 너를 제물로 바쳐야 한단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들이 눈치라도 챌까봐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말합니다. “번제로 쓸 양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
마침내 하나님이 말씀하신 곳에 이르러 아브라함은 거기에다 단을 쌓고 장작을 벌려 놓은 다음 이삭을 묶어서 제단 위에 올려 놓을 때까지 말없이 순종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처럼.

아버지가 자기를 제사지내기 위하여 묶고 있을 때 이삭은 말없는 눈빛으로 아브라함과 이런 가슴의 대화를 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 사실 저는 조금 전에 제가 아버지께서 왜 번제로 드릴 양이 없냐고 물었을 때, 아버지의 표정 속에서 이미 제가 희생제물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아버지, 너무 미안해 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일이잖아요. 제가 죽어 아버지와 하나님께 순종할 수만 있다면 저는 그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실 거예요. 아버지 사랑해요.’
마침내 아브라함이 비장한 각오로 칼을 들었을 때에 하나님의 천사가 급히 개입하여 말합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네가 네 아들을, 비록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 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공경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은 어떻게 그렇게 쓰라린 가슴을 품고 사랑하는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겠습니까? 히브리서 11 장 17-19절 말씀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죽었던 사람까지도 살리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삭의 생명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아들의 생명을 살리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아들의 생명을 바치는 것이 사랑하는 아들에게 더 낫다고 믿었기에 자기의 아들을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생명의 주관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었기에 자기의 아들을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가능성과 약속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결국에는 선이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유대 영성가 아브라함 여호수아 헤셀은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 그분은 영원한 도전이요 절박한 명령이다. 하나님 그 분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분이 아닌 한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분이다. 그러기에 그분 없이 승리하는 것보다, 그분과 함께 패배하는 것이 더 낫다고 우리는 확신한다.” 이 고백은 유대 영성가 아브라함 여호수아 헤셀이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 등에서 나찌의 학살로 무참히 죽어가는 상황을 목격하면서, 비록 그러한 죽음이 아무리 비참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 없이 목숨을 부지하고 사는 것보다 더 낫다는 실존적인 고백입니다.

참된 신앙은 헤셀의 말처럼 하나님을 우리의 전부로, 우리의 가장 중요한 분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순종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것은 하나님 없는 성공이나 안일을 택하지 않고 비록 그것이 고통스럽고 힘겨운 길로 보이고, 세상적인 눈에는 실패자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아픔과 상처 조차도 ‘하나님 없이 평안한 것 보다는, 하나님과 함께 상처투성이의 삶을 사는 것이 더 낫다’는 심정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영성 깊은 삶을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을 치유하는 교회는 자기 자신을 믿음으로 치유하는 데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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