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란 무엇인가?’ 질문 자체가 너무 통속적이고 식상된 느낌이긴 하다. 지금 세상에서 교회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신문을 뒤적이다가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제하의 글이 눈에 띄어 읽다 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오늘의 교회를 반영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즉 “불의와 무자비, 생존 경쟁이 난무하는 이 땅에 ‘교회’가 무엇인지를 삶으로, 온몸으로 답해야 할 한국교회가 답을 잃어 버렸고, 잊어 버렸다. 교회에 관한 책들은 범람하지만, ‘이것이 교회다’라고 보여 주는 곳은 찾기 어렵다. 세계에서 가장 큰 50개의 교회들 중에 23개를 가지고 있고, 서울에만 신자수가 1만 명 넘는 교회가 15개나 되지만, 우리가 믿고, 본받을 만하고, 자랑할 만한 교회와 존경할 만한 스승을 찾기 어렵다. ‘메가처치’를 꿈꾸는 자는 윌로우 크릭이니 새들백, 레이크우드를 찾아다니고, 작지만 영향력 있는 교회를 꿈꾸는 자는 세이비어 교회에 열광한다. 솔직히 한국교회는 ‘성장’에 집착하다가 ‘교회의 본질’을 상실했다.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는 유일한 방편은 ‘질병 치유’와 ‘기복’으로 제한하고, 이 땅에서 자행되는 악한 권력에 저항하기보다는 순응하는 삶을 가르쳤다”고.
이러한 비판은 청운의 꿈을 품고 목회를 시작하려는 목회 후보생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현실 교회는 ‘성장에 집착하다가 교회의 그 본질을 상실했다’는 지적을 그냥 간과해서는 안 되리라고 본다. 더 심하게 말하면 “한국교회는 담임목사 1인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구조이며 카리스마적 목사가 계시를 독점하고, 설교나 축도권을 쥐고 교인들을 쥐락펴락 통제해 왔다. 평신도는 목사의 말에 복종해야 하고, 목사는 어디를 가든 극진한 대접을 받는 것을 당연시하였다”라는 질타는 일부 한국 목회자들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간 교회마다 수많은 프로그램을 통해서 ‘제자 훈련’ ‘제자화’를 시도해 왔으나 막상 그 ‘제자’가 무엇을 위한 그리고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사도행전의 원시 교회를 보면 더 뚜렷하게 현실 교회의 ‘본질 상실’이라는 지적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모임은 “성령의 충만”(행 2:4)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라는 규탄과 고발로 자신의 죄를 절규하며 저려오는 가슴을 치고 몸부림치는 과정을 겪는다. 그 후 그들은 누구의 강요나 지시 없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마음을 같이”(한 마음)하며, 은이나 금을 모으지 아니하고도 공급되는 손길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쓸 것을 채우는 일에 전심전력을 했다. 그리고 예수의 제자가 된 후에는 교회에서 명예나 지위를 얻어 권위를 세우거나 다스리는 자가 되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손발이 잘리고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최후를 맞는 삶을 살았다(행 7:57).

물론 현실에서 완벽한 교회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거대했던 교회들이 몰락해 지금 관광지가 되어 버린, 텅 빈 유럽 교회들만 나무란다면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이제라도 참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목회 전선에 있는 우리가 고민하며 마음의 베옷을 두르고 몸부림을 쳐야 한다. 이제는“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딤전 6:9)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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