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두를 사러 단골 마켓에 갔다. 그곳에선 여러 가지 종류의 견과류들을 원하는 만큼만 저울에 달아서 살 수 있다. 고객의 편의를 위해 봉투와 종이 태그(꼬리표) 그리고 품목 번호를 적을 수 있는 볼펜이 준비되어 있다. 한 파운드 이상 사면 할인해 주기도 한다. 요즘 들어 많은 사람들이 건강에 좋다고 먹는 견과류들 중에서 깨끗해 보이는 호박씨와 호두를 각각 한 파운드 조금 넘게 봉지에 담았다. 그리고 태그에 네 자리 숫자로 된 품목 번호를 각각 적어 넣었다. 카운터에서 계산하며 10% 할인을 해주었느냐는 나의 질문에 캐셔는 “그럼요. 여기 27센트 드렸지요.”하고 대답했다.

27센트라는 캐셔의 대답이 얼른 이해되지 않았지만, 뒤에 줄서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서 신용카드로 지불하고 총총히 집으로 돌아왔다. 물건들을 정리해 놓고 늘 하던 대로 영수증을 다시 점검해 보았다. 다 맞는 것 같은데 한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이 눈에 띄었다. ‘웬 현미? 현미는 사지 않았는데? 그리고 호두는 어디 있지?’아무리 위아래를 훑어 보아도 호두가 계산서에서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먼저 스친 생각은 현미와 호두의 가격 차이가 많이 난다는 거였다. 호두가 훨씬 비싸다. 바로 그 순간 내 안에 문제가 생겼다. 악하고 간사스러운 마음이 재빠르게 선한 양심 앞에 나타난 것이다.

“내가 잘못한 것은 아니지. 그 캐셔가 숫자를 잘못 찍은 거야.”악한 마음이 선한 양심을 밀치며 목청을 높인다.
“음, 그래도 분명히 현미보다 호두가 훨씬 비싼데?” 선한 양심이 대꾸하자 악한 마음이 바싹 다가와서 선한 양심을 흔들어댄다.
“잘못한 것이 없다니까 그래. 그 여자, 캐셔가 잘못 숫자를 찍었다구. 걱정할 것 하나 없어. 생각해 봐. 지금 그 마켓에 가서 캐셔가 잘못했다고 일러바치면 그 캐셔는 해고될지도 몰라. 왜 그런 위험한 일을 하려고 해?”악한 마음이 꽤나 의로운 양 떡 버티고 서서 선한 양심을 윽박지른다.
“그래 맞아. 잘못한 건 없어.” 겁먹은 선한 양심이 겨우 대답한다.

나는 힘없이 그 영수증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왠지 그 호두 봉지를 풀고 싶지 않았다. 태그가 붙어 있는 그대로 냉장고에 집어 넣고는 잊어 버렸다.
다음날 아침 성경을 읽는데, 마침 여호수아 7장과 8장에서 ‘아간’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아간은 자신의 탐심을 다스리지 못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죄를 지었다. 그 후 그가 저지른 모든 죄가 탄로나, 그와 온 가족이 돌에 맞아 죽는다는 비극적인 이야기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 이제껏 움츠리고 있던 선한 양심을 흔들어 깨웠다.

그 순간 지체없이 선한 양심이 일어섰다. 이때까지 악한 마음에 눌려 있었는데,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서 힘을 얻어 조용하지만 단호한 음성으로 악한 마음을 꾸짖었다. “만약에 말야. 그 영수증에 호두보다 더 비싼 물건의 가격이 기재되어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악한 마음이 한 발 물러나 조금 기죽은 소리로 대답했다. “글쎄, 마켓으로 금방 되돌아갔겠지? 더 많이 지불된 액수를 되돌려받기 위해서말야.”
“바로 그거라구. 아마 그 캐셔가 해고되는 것에는 관심조차 없었을 걸.”선한 양심이 악한 마음을 꾸짖었다.
하는 수 없었던지 악한 마음이 선한 양심에게 풀죽은 소리로 고백했다. “아마, 숨이 턱에 닿도록 마켓으로 뛰어갔겠지. 그리고는 빈틈없이 계산해서 더 지불한 돈을 돌려 받고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왔을 거야.”
때를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선한 양심이 악한 마음을 다그쳤다. “빨리 모든 것을 바로잡으라구. 그 호두 봉지를 뜯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어.”

일을 바로잡으려면 영수증이 있어야 하는데, 그 영수증은 이미 쓰레기통에 버려진 뒤였다. 영수증을 찾으러 쓰레기통이 있는 차고로 내려갔다. 장갑을 끼고 냄새나는 쓰레기 속을 뒤적거렸다. 다행히 그 영수증을 찾아내기는 했지만, 벌써 냄새가 배고 구겨져서 볼썽사나웠다.

“후유, 그래도 찢어지지 않아서 고맙다.”퀴퀴한 냄새가 나는 영수증을 대강 펴서 잠시 마르도록 놓아두고는 냉장고 안에서 호두 봉지를 꺼냈다. 잠시 후 서둘러 마켓으로 향했다. 고객 센터에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내가 다시 온 이유를 조용히 듣고 있는 여직원을 보면서 문득 ‘혹시 처음부터 내가 잘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퍼뜩 스치고 지나갔다. 그곳 여직원에게 호두 봉지의 태그가 적혀 있는 그 번호가 어떤 품목의 번호인지 알아봐 줄 것을 먼저 부탁했다. 내가 혹시 품목 번호를 잘못 기입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제서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품목의 고유번호를 확인해 본 여직원이 내게 말했다. “손님, 이 번호는 현미쌀 고유번호인데요?”“네? 정말요? 아, 그러면 제 잘못이었군요. 제가 번호를 잘못 보고 기입한 것을 미처 몰랐군요.”원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얼굴이 뜨거웠다.

그날 계산대에서 받은 할인 액수가 겨우 27센트라고 알려 주었을 때, 얼른 이해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빠르게 내 머릿속을 스쳐갔다. 결국 애초부터 내 실수로 일어난 일임이 밝혀진 것이다. 물론 캐셔에게도 카운터에서 영수중에 나타난 품목의 이름과 실제의 품목이 다른 것을 발견해야 하는 책임이 있을 것이다. 그 캐셔에게도 실수는 있었다. 그럼에도 7달러 남짓한 차액을 지불해야 하는 책임은 내게 있었다.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차액을 지불하려고 가방을 뒤적이는데, 그때까지 한쪽에서 내내 우리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다른 직원이 돌아서서 내게로 왔다. 그리고 친절한 말씨로 내게 말했다. “아, 걱정하지 마세요. 전적으로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캐셔에게 잘못이 있었지요. 우리가 그 캐셔에게 잘 이야기하겠습니다. 그 일 때문에 일부러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그 직원의 눈빛과 표정은 정중했다. 그 일은 그렇게 마무리되었고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계속 빚을 진 듯한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카운터에서 일했던 캐셔에게도 불찰은 있었겠지만 애초부터 내가 실수를 했는데 하는 마음 때문인 듯했다. “하나님, 제 안에 부끄럽고 악한 마음이 늘 있습니다. 그 간사하고 악한 마음을 물리칠 수 있도록 말씀을 통해 깨우쳐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주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그런데 왠지 자꾸 양심에 무엇인가 걸려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 호두와 현미의 차액을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렇게 마음이 편치 않은 내 안에 성령님께서 언제나처럼 위로와 지혜를 주셨다. “얘야, 네가 종종 도와 주는  아이들 병원에 그 차액을 보내 주면 어떨까?”“아, 네! 그러면 되겠어요! 성령님, 감사합니다!”

그동안 적은 액수이지만 가끔씩 기회가 될 때마다 조금씩 돕고 있었던 ‘St. Jude Children’s Research Hospital’에 그 차액을 보내 주면 되지 않겠느냐는 성령님의 조용한 깨우침이셨다.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어린아이들의 암을 치료해 주는 그곳에 후원금을 조금 보내려던 차였는데, 그 병원에 그 차액을 보내 주라는 주님의 인도하심이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은 언제나 정확하다. 다시 한 번 성령님께 감사를 드리고 그 차액 7달러를 더 보태어 수표를 썼다. 봉투에 수표를 넣어 오늘 아침 우체통에 넣고 집안으로 들어와서야 그 호두 봉지를 풀었다. 이제는 평안한 마음으로 호두를 먹어도 될 것 같다.

살아가다 보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라며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이런 일을 통해서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 또한 감사하다. 작은 일이라면서 바르게 처리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큰 일들을 결코 바르게 처리할 수 없을 것이라는 깨달음과 내가 해야 할 몫은 내가 책임져야만 내 안에 참 평안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했다.

양쪽에 날선 검처럼 양심과 마음과 골수까지도 투명하게 조명해 주시고 바로 잡아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능력과 인도하심을 통해서 모든 문제는 무릇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고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시는 보혜사 성령님이 정말 좋다. “주님, 이런 일로 해서 제 마음을 조금 더 깨끗하게 바로잡아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리 제게 큰 복인지요. 부족하고 허물 많은 저를 하나님 계신 본향 집으로 부르시기 전에 좀 더 다듬어 주시는 주님의 그 크신 은혜가 너무나 좋고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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