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으면 새벽이 머지않다고 한다. 그러나 밤새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어렸을 적 충청도에서 어른들을 만나면 “안녕히 주무셨슈?”하거나 “진지 잡수셨슈?”하고 인사했다. 가난했던 농부들이었기에 좋은 의술의 혜택을 받을 기회가 없어서 전염병이 돌면 이집 저집에서 통곡소리와 함께 아침이 찾아오기도 했다. 일제 식민지 시절과 육이오를 거치는 동안 인권이나 공공의료혜택은 거의 없었다. 그러니 무섭고 어두운 밤이 지나고 이웃을 만나면 무사한 것이 반가웠고, 굶지 않고 식사할 수 있는 것이 다행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런 인사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옛날에는 닭서리, 참외서리, 사과서리, 수박서리라 하여 남이 정성들여 가꾸어 놓은 농작물을 한밤중에 훔쳐가면서 서리라는 미명하에 그야말로 쑥대밭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지금은 어림도 없는 이야기지만 그 시절에는 어느 정도 용서가 되기도 했다.

나는 각종 동물, 채소나 화초 가꾸기를 좋아한다. 몇 년 전에 한가한 교외 지역에서 살 때는 10여 종류, 200여 마리의 동물을 키우고 각종 꽃과 채소를 가꾸며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누려 보기도 했다. 4-5년 전 이곳으로 이사하면서 시에서 허락하는 최소한의 가축인 닭과 기러기 몇 마리를 데리고 와서 같이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참담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무슨 동물이 그랬는지 기러기 한 마리를 무참히 살해하여 목과 가슴 등 절반 정도를 뜯어먹고 사라졌다. 이 구석 저 구석 철망을 손질하고 하루가 지났다. 다음 날 아침에는 알을 낳고 있는 어미 닭이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매일 반복되는 상황에 아무리 닭장을 손질해도 소용이 없다. 10여 마리의 닭과 기러기가 다 사라진 날 아침에 땅에 닿은 철망 일부가 녹이 슬어서 구멍이 난 것을 발견했다. 그냥 보아서는 멀쩡하고 밀어 보니 틈새가 벌어진다.

우리 속담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있다. 잃어 버리기 전에 왜 안 고쳤을까를 생각했는데 이제야 그 사람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다. 가축은 잃었을망정 다음을 위하여 닭장은 고쳐야 했다. 큰 판자 조각을 대고 말끔히 손질했다. 이제는 안전할 성 싶어서 가축 경매장에 가서 4-50일 기른 중병아리 6마리를 사왔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밤새 안녕했길 바라는 심정으로 닭장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여섯 마리가 한꺼번에 무참히 살해당한 것이 아닌가. 오소리의 짓이다. 작은 위로와 보람으로 몇 마리의 가축 기르는 취미를 야생 동물 때문에 그만두려니 여간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 아니다.

4면을 뱅글뱅글 돌아가며 쥐 한 마리도 드나들지 못하도록 철저히 막고 다시 중닭 5마리를 사다 넣었다. 이번에는 생포할 수 있는 오소리 덫을 렌트하여 닭장 밖에 설치해 놓았다. 다음날 눈을 뜨자마자 닭장으로 달려갔다. 덫에는 아무 것도 없다. 닭장 안을 보니 네 마리가 무참히 찢겨 죽어 있다. 너무 속이 상하고 분했다. 마지막 남은 한 마리가 나를 보더니 반갑게 달려온다. 지난 밤 살아남기 위하여 얼마나 푸덕거리며 도망다녔을까 생각하니 애처롭고 불쌍하다.

울상이 된 우리 딸 시내가 아빠 하나님께 지켜달라고 기도하자고 한다. 그래 미처 그 생각을 못했구나 하고 시내의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한 다음 살펴 보니, 그동안 생각지도 않았던 천정에 커다란 구멍이 나있고 기둥을 타고 오르내린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다. 왜 진작 이곳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한 마리 닭이 너무 외롭고 불쌍하다면서 몇 마리 더 사오라고 시내가 야단이다.

얼마 전에 오리 알을 구해다가 작은 부화기에 넣고 보살피고 있는데 엊그제 아침, 7마리의 귀여운 오리 새끼가 알을 까고 나왔다. 처음에는 작은 구멍을 뚫고 숨을 쉬기 시작하다가 하루가 지난 후에 빙 돌아가며 알을 깨고 빠져나온 것이다. 처음 나오면 털은 다 젖어 있고 볼품이 없다. 화씨 100도에 맞추어 놓은 무더운 부화기 속에서 대여섯 시간 후에는 보송보송하게 털이 마르고 귀여운 자태로 탈바꿈한다. 계란 껍데기를 스스로 깨고 나오면 새 생명이 되지만 남이 깨면 계란 프라이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 생각난다.

앞으로 3주 정도는 집안에서 키워야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커다란 박스에 백열등을 켜 넣어 주면 추울 땐 가까이 가고, 더울 땐 멀리 떨어져 자동 온도조절을 하며 어미 품에서와 같이 잘 자란다. 습성이란 어쩔 수 없는지 마시라고 넣어준 물그릇 속에 들어가 장난치며 놀기도 한다. 먹성이 얼마나 좋은지 어미오리 한 마리가 돼지 한 마리의 식사량을 먹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리알은 28일이 되어야 부화하고, 닭은 21일, 기러기와 거위는 28-32일 걸린다. 계란 노른자는 새끼를 만드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흰자위가 새끼를 형성하고 나면 18일 후에 병아리 몸속으로 들어간다. 노른자는 태어나서 2-3일간 먹이를 먹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비상 영양을 공급하는 역할로 만족한다.

그동안 놀라고 상처받은 마음이 귀여운 오리 새끼들의 재롱을 보면서 조금은 위로를 받는 느낌이다. 이제 닭장의 안전이 확인되면 닭을 몇 마리 더 사다 넣고, 오리 새끼들이 좀 더 자라면 닭 사육장으로 옮겨 더 이상 밤새 안녕 하는 심정으로 뛰어나가는 일이 없기를 기원한다.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와 치유로 인도하시는 은혜가 무한히 감사하다.(워싱턴 주 밴쿠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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