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게 앞에는 알로에가 화분에 담겨 건강을 과시하고 있다. 오래 전, 약 25년쯤 되었을까. 상처 난 피부에 효과가 있다면서, 혹시 뜨거운 다리미에 살을 델 수도 있으니 세탁소에는 필수품이라고 손가락 만한 알로에를 심은 작은 화분을 친구가 갖다 놓았다. 오랜 세월을 유용하게 쓰고 있지만, 어찌나 잘 자라고 번식하는지, 이사람 저 사람에게 많이도 나누어 주었다. 아직도 두 개의 큰 화분 속에서는 내 허리쯤까지 올라온 키에, 굵기는 어린아이 팔 만하게 자란 건강한 줄기들이 새싹까지 내고 있어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오늘 아침에도 알로에 화분을 본 손님이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green thumb”이 있다고 했다. 화초나 작물을 기르는 데 특별한 재주가 있다는 표현이었다. 집에서는 누군가가 선물한 화초들도 곧 죽어 버리지 않으면 다행이고, 살아 있다 할지라도 초라하기가 불쌍해 보일 정도인지라, 나에게 그런 말이 과분하게 들렸다. 알로에가 잘 자라는 이유는 순전히 가게가 그 성질을 만족시키기에 합당한 곳이기 때문인 듯하다.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가끔 한 번씩 물을 주는 것밖에 없다. 가게 안의 높은 온도가 잘 맞고, 습기 또한 적당한데다 그 식물의 번식력이 강한 때문이지 내 공은 조금도 들어 있지 않은 게 사실이다.

정말 찬탄이 나올 정도로 특별히 식물을 잘 기르는 분들을 뵙기도 한다. 어떤 분의 뒤뜰에는 없는 것이 없다. 잔디를 걷어내고 심은 유실수는 나날이 건강해져서 실하게 열매를 맺고, 해마다 씨 뿌리고 가꾸는 화초와 채소들은 어찌나 건강해 보이는지 행복하다고 속삭이는 듯 보였다. 그댁의 식탁은 뒤뜰에서 나오는 갖가지 채소들로 늘 풍성했다. 야채를 구하기 위해 시장을 가는 일이 드물다고 했다. 바구니를 들고 뒤뜰에 잠깐 가면 두 식구를 위한 부식도 충분하고 이웃과 나누기에 바쁘다고 했다. 비결은 간단했다. 부엌에서 나오는 거의 모든 쓰레기는 쓰레기가 아니라 거름이라고 했다. 생선의 뼈나 달걀 껍질은 물론이요, 채소를 다듬은 것들과 과일 껍질은 모두 뒤뜰에 묻어 준다고 했다. 자연히 토질이 비옥해져서 거름이나 비료를 사서 뿌려 본 적이 없다고 하니, 요즈음 선호하는 유기농 채소를 가꾸고 있는 것이다. 파의 뿌리를 심으면 싱싱한 파가 되어서 나오고, 참외를 사다 먹고 껍질과 함께 묻힌 씨가 싹을 틔웠는지 집에서 기르기 힘든 풍선만한 한국 참외가 노랗게 익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면 버릴 것으로 생명을 살려내고 있는 그분에게 존경하는 마음까지 생겼다. 이쯤은 되어야 ‘green thumb’이 있다고 말해도 될 것 같다.

 
지치도록 일을 하다가 잠시 쉬는 시간이었다. 피곤했지만 생각난 김에 한동안 연락을 하지 못했던 그분에게 안부 전화를 걸었다. 행복한 목소리였다. 경기가 어렵기 만한 요즈음에도 잘 나가고 있는 자신의 사업 이야기, 자녀들의 특별한 성공과 효행에 대해, 큰 목소리로 도무지 끼어들 틈도 주지 않고 쏟아놓았다. 전화를 건 사람의 생각과 안부는 도무지 안중에도 없었다. 재미없는 라디오 방송을 듣는 듯한 일방적인 대화를 끝내고 나니 맥이 빠지고 허무해졌다. 전화했던 일이 후회가 되었다. 화가 난 가장 큰 이유는, 다 비우고 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곤 했는데 그렇지 못한 내 속을 보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누군가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지 못하는 못난 심보가 내 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니. 밴댕이 속 같은 자신에게 화가 나고 심사가 크게 뒤틀리는 괴로운 시간이었다.

단골손님인 낸시가 평소와는 다른 내 표정을 읽었나보다. 웬일이냐고 묻지도 않고 손을 잡아 주며 웃었다. 언제 점심이나 같이 하자며 쳐다보는 눈에 안쓰러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힘을 내라며 어깨를 툭 치고 나갔다. 신경을 쓰게 해서 미안한 마음에 걱정하지 말라면서 억지 웃음과 함께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잠시 후 그녀가 다시 왔다. 한 손엔 아이스 커피가 들려 있었다. 고마워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우울했던 마음이 금방 달아났다. 피곤한 몸도 거뜬해지며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나를 살리는 ‘green thumb’이 그녀를 통해 일하고 있는 순간임을 깨달았다.

가끔 그녀처럼 ‘green thumb’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난다. 그들 앞에 있으면 어른이든 어린이든, 어떤 형색을 하고 있든 되살아나는 느낌을 받는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만한 자리에 있는데도 누구와 마주하든 그들에게선 겸손이 묻어나온다. 상대에게 눈을 맞추고 그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 준다.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는 눈을 돌리지도 않고 다른 일을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식사 시간에 이야기를 하면 딱하게도 수저를 아예 놓고 듣고 있다. 모든 행동이 억지스럽지 않고 저절로 풍겨 나온다.
누군가가 찾아와 상담을 하면 자신도 그런 문제로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 또는 힘들어 하고 있는지를 솔직히 말하며 해결책을 찾아 같이 고민한다. 상담 내용이 다른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일은 절대로 없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을지라도 관심과 사랑이 상대방에게 전해진다. 마음이 한결 포근해진다.

낸시에게 믿을 만한 상담자,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의 소유자요, 겸손한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쑥스럽지만 그리 봐주니 고맙다고 내 의견조차도 존중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자꾸 “칭찬을 들으면 자만해질 수 있는 약한 성정을 가졌다”하며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칭찬이 부담스럽다는 이야기를 했다. 존경할 만한 겸손이었다. 사람을 살리는 그분의 ‘green thumb’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과 겸손이 바탕이었던 것이다.

작물을 살리는 손도 좋지만 사람을 살리는 힘이 있었으면 좋겠다. 어디서든 상대를 이해하고 다독일 수 있는 마음과 말, 약함을 감싸 줄 수 있는 그윽한 눈빛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올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역시 겸손과 영혼 사랑이 내 안에 먼저 깔려야만 가능할 것이다.

겸손과 사랑으로 무장된 후에는 필요한 사람들에게 달려가고 싶다. 말라 버린 화초에 조심스레 물을 주듯이, 외로움과 아픔으로 힘들어 하는 영혼에게 달려가 내 속에 쌓인 겸손과 사랑이 그 위에 뿌려졌으면 좋겠다. 아직도 남과 자신을 비교하는 수준인 내가 그런 일들을 해낼 수 있는 때가 오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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