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시대만 해도 여자로 태어난 것 자체가 크나큰 불행이었다. 여성은 남성에 비하여 차별과 불이익이 매우 심각했다. 그래서 남자들은 짐승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했고,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했다는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불치병을 앓고 있었다. 혈루증 곧 ‘피를 흘리는 병’이다. ‘아래’로 피가 그칠 줄 모르고 흘러내린다. 그런데 그것도 열두 해째 앓고 있다. 열두 해, 참으로 긴 세월이다. 열두 살 때 시작되었다면 스물넷까지 앓고 있는 셈이다. 그때 평균수명으로는 인생의 삼분의 일을 투병으로 보낸 여자였다.

그 병 때문에 결혼은 꿈도 꾸지 못했다. 요즈음 같으면 시집 안 가면 그만이지만 그때는 여자 혼자 살아남기에는 너무도 고통스러운 환경이었다. 게다가 가족과도 함께 지낼 수 없다. 정결법 때문에 격리되어 살아가야만 한다. 혈루증보다도 더 아픈 것이 뼛속을 파고드는 고독병이었고 다른 사람들의 천대병이었다.
  치료를 받는 것이 또 고통 위의 고통이었다. 여자 의사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남자의사에게 치료받아야 하는 수치감도 너무 컸다. 아니, 치료 그 자체가 칼로 베이는 아픔이었다.  그러나 그 같은 치료조차도 계속할 수 없었다. 치료비를 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부모로부터 받은 얼마의 재산도 바닥이 나고 말았다.
  그러고서라도 악한 질병이 더 심하게 되지만 않는다면 큰 격려가 될 터였다. 질병은 더하지 않으면 낫는 것이라 판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흘러나오는 피의 양도 점점 더 많아지고 빛깔도 더 새까맣게 되어 갔다. 이제 죽는다는 절망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다. 마치 자신의 생명이 거의 다 탄 촛불 같았다. 그것마저 바작바작 잔인하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에 예수께서 하신 일을 듣게 되었다. 놀라운 기적들을 일으키는데 그 가운데 제일 많은 기적이 난치병 고치는 것이라는 뉴스였다. 결사적으로 나섰다. 불결한 여자는 남자 가까이 가면 결코 안 된다는 율법은 휴지통에 던져 버렸다.
드디어 예수님의 옷 가를 만지는 순간 흐르던 피가 멎는 것을 느꼈다. 그것도 혈루증의 근원 곧 뿌리째 마르는 완벽한 치료였다.  하나님은 그 여자에게 숨통만은 열어 놓아 주셨다.  
 성경에는 그 여자를 ‘열두 해 혈루증을 앓는 한 여자’라고만 했다(막 5:25-34). 이름도 없고 성도 없었다. 그런데 외경 ‘니고데모 복음서’에는 그 이름을 베로니카라고 밝혔다. 예수님께서 십자틀 지시고 해골언덕을 올라가실 때 구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지고 간 일이 있었다. 그 순간 하얀 머리 수건을 예수님에게 벗어드린 여자, 그가 바로 베로니카였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뒤에 베로니카에게 다시 돌려 주셨다. 집에 가지고 와서 살펴 보니 바로 거기에 예수님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피로 그린 초상화였다. 그래서 베로니카는 예수님의 유일한 초상화 곧 그분의 형상을 영혼 속에 항상 품고 사는 여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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