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 나이 많은 한 부호가 있었다. 임종이 가까운 줄 안 그는 유서를 남기기로 하고 그의 모든 재산을 점검했다. 그 후 유서를 쓰기를 “나의 모든 재산은 나의 아들이 아닌 하인에게 상속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에게는 “여기 있는 재산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것 하나 골라 소유하라”고 했다. 가만히 생각하던 아들은 이것 저것 고르는 척하다가 “예, 아버님. 전 가질 바에는 당신의 하인을 소유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께서 두아디라 교회에 편지하신 내용이 있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내가 또 새벽별을 주리라”(계 2:26-29)라는. 여기에서 ‘새벽별’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함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천하를 소유한다 하더라도 천상천하를 모두 창조하신 그분을 소유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음이 사실이다.
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새벽별’로 표현하셨을까? 하루 가운데 가장 어둡고, 견디기 어려운 때는 바로 먼동 트기 직전인 새벽이다. 병고에 시달리거나 불면으로 날이 새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기다림을 겪던 때 경험하는 바이지만, 먼동이 트려는 바로 그때가 가장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다. 앞이 캄캄한 암흑처럼 절망적인 상황에 다다랐을 때 새벽별이 소망의 빛으로, 구원의 빛으로 찾아오셨던 경험을 누구나 체험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새벽별은 인생의 모든 소망을 채우는 그 자체임과 동시에 주시되“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눅 6:38), 넉넉하게 채우시는 분으로 이를 다윗은 ‘내 잔이 넘친다’고 했다(시 23:5).
많은 사람들이 본질보다는 가시적인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아무리 많은 재물을 쌓는다 해도 단 한 시간의 생명도 연장할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세상 물질을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최근에 전두환 전 대통령의 처참한 모습이 잘 보여 주듯이, 그가 대한민국의 모든 재물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그의 욕심의 배는 채워질 리 만무하며, 그렇게 많은 것을 소유하고도 문어발처럼 이리저리 엉키게 하여 엄청난 재산을 숨겼지만 결국 몰수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것을 보면서 처참하다 못해 가련한 느낌마저 든다. 그가 만일 그 모든 소유보다 정의와 공의를 더 소중히 여기고, 가시적인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안목과 함께 일말의 신앙을 소유하였더라면, 이러한 최후는 맞지 아니했을 것이다. 그 많은 소유로 남을 구제하고 선한 데 물질을 나누는 실천을 했더라면, 후세에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으며 조국의 영웅으로 추대를 받을 수 있었을까 하는 가당치 않은 상상도 해본다.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 다니는 안개니라”(잠 21:6)라는 잠언 기자의 말씀이 새삼 새롭게 들어온다. 거짓과 사기로 재물을 모은 자들의 말로가 어떠한가 하는 것은 일일이 그 예를 열거하지 않더라도 모두가 익히 경험하고 아는 바다. 물질의 노예가 되거나 물질을 우상처럼 섬기게 되는 때 그러한 사람은 생명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게 되니(요 1:12) 이보다 더 큰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동시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는 말씀은 세상에 속한 물질이나 영광과 비교가 안 되는 약속임에 틀림없다. 가질 바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함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사실을 정말 실감할 수 있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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