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막내 덕분에 영화 한 편을 구경했다. 막내가 보자 하면 무조건 보아야 한다. 남편이 오래간만에 괜찮은 영화를 본 것 같다고 한다.  아이디어는 기발했지만 어두운 내용이어서 느긋하게 감상할 수는 없었다.

 
'In Time'(2011년 영화)

영화 제목 'in time'은 '제 시간에 맞추어, 시간에 늦지 않게'를 의미하는 숙어인데 여기선 중의적으로 쓰인 듯하다. 시간에 늦으면, 즉 시간에 맞추지 못하면 죽는다는 부정적 의미와 거대 재벌의 음모에 의해 자연적 수명이 아니라 자본화된 시간에 목숨을 저당잡힌 세상을 더 늦기 전에 바로잡아 보겠다는 긍정적인 의미가 영화 속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때는 3013년, 인간은 25살이 되면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다. 유전공학적으로 팔뚝에 삽입된 디지털 시계에는 1년의 시간이 주어지고, 그 순간부터 시간은 화폐의 기능을 한다. 밥도, 공중전화도, 아파트 임대료도, 자동차값도 다 팔뚝 시계에 저장된 시간으로 계산해야 한다. 시간만이 세계 공통 화폐이다. 더 이상 늙거나 병들지는 않지만, 시간이 떨어지면 심장이 자동으로 멈추어 버린다. 국가는 타임존으로 나뉘어 있다. 이 영화에는 두 지역이 나온다. 부자들이 사는 뉴 그린위치와 빈민가 데이튼이다. 데이튼 주민은 하루라도 그 지역의 공장에서 일을 하지 않으면 죽는다. 하루 살기도 빠듯하기 때문에 옆에서 사람이 죽어도 시신을 수습해 줄 겨를이 없고, 친구들과 마음 편히 노닥거릴 수도 없이 밥도 빨리 먹고, 걸음도 뛰다시피 걷는다.

주인공은 시간을 넣고 빼는 기기를 제조하는 공장에서 일하는 28세의 윌 살라스(저스틴 팀버레이크)이다.그는 어머니와 함께 산다. 첫 장면에서 모자는 일하러 나갈 준비로 부산하다. 엄마가 다음날의 귀가 시간 엄수를 부탁하며 점심 식사비로 30분을 아들에게 준다. 그날 저녁 친구를 만나려고 술집에 잠시 들른 그는 뉴 그린위치 출신의 시간 부자를 발견한다. 소문이 빠른 동네인지라 조폭이 시간 강탈을 하러 나타나고, 주인공은 그를 구해 준다. 그러나 이미 100년 이상 살았고, 팔뚝 시계에 100년의 시간이 저장되어 있는 그 남자는 소수(1%?)가 다수(99%)를 지배하는 세상의 음모를 일러 주고, 수명 연장의 권태와 부질없음을 읊조리다가 주인공이 잠든 사이 자신의 시간을 넣어 주곤 자살해 버린다. 그러나 시간 지킴이라 불리는 경찰은 감시 카메라에 찍힌 윌을 살인자로 지목한다.

친구에게 10년을 나누어 주고 엄마와 함께 뉴 그린위치로 가려 했지만, 버스비가 모자라 아들을 만나지 못한 엄마는 시간이 떨어져 죽고 만다. 아들에게 준 점식식사비가 엄마의 자식을 위한 희생이 된 것이다. 분노한 아들은 음모를 파헤쳐 세상을 돌려 보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품고 부자촌으로 들어간다. 그곳의 카지노에서 포카로 돈을 따는 것을 계기로 팔뚝에 늘 1만 년을 가지고 경호원에 둘러싸여 움직이는 시간 재벌 필립 웨이스와 아버지가 선물한 10년의 범위 안에서 보호만 받고 사는 27세의 딸 실비아(아만다 세이프라이드)를 만난다. 

그를 추적해 온 경찰을 따돌리기 위해 윌은 실비아를 인질로 삼지만, 그가 살인자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시간의 노예 상태에서 풀어 주고 싶어하는 꿈을 지닌 젊은이인 걸 알면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늘 공허했던 실비아는 그와 함께 시간 은행을 털러 다닌다. 은행을 털어 데이튼 주민들에게 강탈당한 시간을 돌려 주자, 부자들과 경찰은 살인적인 물가로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면서 은행털이범들을 잡으려 하는데 실비아가 나서서 아버지를 볼모로 잡아 개인 금고에서 백만 년의 시간을 빼내 극빈층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준다. 도망자의 신세이기에 조폭들에게 잡혀 러시안 룰렛 닮은 시간 뺏기 게임을 강요당하기도 하고, 시간 키퍼 레온의 집요한 추적도 극적인 순간에 따돌리는데, 주인공 남녀는 가고 싶어하고 가야 할 곳이 서로 같다는 걸 안다. 마침내 엄청난 규모의 은행을 털려고 주인공들이 폼을 잡는 데서 영화는 끝이 난다.

 

둘은 자신의 팔뚝에 엄청난 시간을 축적하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한계선상에서 냉혈한 같은 경제 체제에 도전장을 내민다. 따지고 보면 아프지 않고 늙지 않고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은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것이니, 욕망의 덫에 걸리기는 부자나 빈자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신이 될 수도 없고 욕망을 포기할 수도 없는 인간은 지구촌 사람들의 수명을 유한한 재화로 인식하고 남의 시간을 빼앗아 내 수명을 늘리는 방법을 고안해 낸다. 적자생존의 법칙, 자본주의 시장경제 논리, 그러나 알고 보면 소수의 독재 논리가 적용되고 그리하여 소수의 기회를 선점한 시간 부자들은 천문학적인 시간을 소유하고, 그럭저럭 여유를 누릴 수 있는 만큼 시간을 버는 중간 계층은 현 체제의 지킴이 역할을 하고, 빈곤층은 부자들이 요구하는 대로 죽어라 노동해서 연명한다.

주인공을 제외하곤 출연자들 대부분이 표정이 없다. 부자들일수록 더하다. 생김새는 달라도 모두가 스물 다섯 살이니 젊은 얼굴을 자랑할 일도 없다. 표정이 사라졌다. 한눈 팔 겨를 없는 빈자나 시간이 남아 돌아 일상이 지루해져 버린 부자나 모두가 로보트 같다. 그들의 공통적인 관심은 온통 시간, 우월감과 열등감. 박탈감과 권태뿐이다. 나무도 풀도 꽃도 애완동물도 없다. 질서 유지를 위해 시간의 무상 증여를 할 수 없다는 대사를 듣는데 문득, 소규모 자영농에서 농업노동자로 전락한 이들 앞에서 가격 유지를 위해 오렌지(?)를 몽땅 바다에 폐기하던 <분노의 포도> 소설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이익을 낼 수 없다고 배추밭을 갈아 엎고, 전염병 때문에 기르던 동물들을 몽땅 구덩이에 파묻는 뉴스도 떠올랐다. 그래서 느긋하게 영화를 감상할 수 없었다. 섬뜩하고 무섭다는 생각에... 나와 이웃의 어두운 내면을 들킨 기분이 들어서...

이 영화의 장르는 디스토피아 사인어스 픽션이란다. 부정적인 유토피아, 인간의 욕구를 실현한 유토피아가 오히려 인간의 자연성이나 다양성을 말살하는 비극을 초래한다는 이야기라나. 현실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의외의 설정이 재미있긴 해도 그저께 막내가 보여준 일본 만화영화가 더 좋다.

 
'늑대아이 유키(눈)와 아메(비)'

제목부터 예쁘다. 엄마 이름은 하나인데 꽃이란 뜻이다. 대학 강의실에서 잘 웃는 여대생과 우수에 잠긴 키 큰 청년이 우연히 만나 사랑이 싹트는데 기막히게도 청년은 지상에 하나 남은 늑대인간이었다. 그래도 서로 사랑했기에 둘 사이에 딸과 아들이 태어나지만, 아빠가 된 청년은 도시 한가운데서 늑대의 모습을 한 채 사고로 죽고 만다. 기분따라 늑대가 되었다가 인간이 되었다가 하는 두 아이를 주변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에서 기르기 위해 엄마는 인적 드문 산골로 이사를 감행한다.

인간도 아니고 늑대도 아닌, 아니 인간이기도 하고 늑대이기도 한 아이들을 어떤 식으로 길러야 할지 몰라 엄마는 어쩔 줄 모르면서도 순박한 시골 이웃들의 도움을 받아 좌충우돌 환경에 적응해 간다. 하지만 세월은 흘러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좌절하고 고민하는 순간이 아이들에게 닥치고야 만다. 방황과 갈등 속에서 두 아이는 마침내 엄마의 품을 벗어나 마음이 일러 주는 길을 따라나선다. 유키는 인간의 길로, 아메는 늑대의 길로...

인간 공동체 역시 크게 보면 자연의 일부이지만, 아메는 인간에 의해 자꾸만 파괴되어 가는 자연, 멸종되어 가는 야생 동물에 마음이 쓰여 늑대로서 자연의 지킴이가 되기 위해 인간의 모습을 버린다. 유키는 인간으로서의 꿈을 좇아 인간들과 어울리며 살기 위해 늑대의 본성을 누른다. 엄마는 인간 세상과 인간의 손을 타본 적 없는 자연의 경계에 있는 외딴 집에서 양쪽 세상에 귀를 대고 두 아이를 그리워하면서 잘 살아내길 기도한다.

그림도 예쁘고 친환경, 친자연적인 주제도 좋고 요즘 영화마다 넘치던 욕설이나 폭력이 없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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