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 위젤의 <밤>은 2차세계대전의 끝 무렵, 펜실바니아 지방의 시게트 출신의 저자(책 속의 엘리에젤)가 열대여섯 살 무렵에 겪은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이야기다. 죽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악착같이 생명줄을 붙들었던 엘리 위젤은 전후 10년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추억으로 묻을 수 없는 현재형의 상처들을 글에 담았다 한다.

오프라 선정도서마크가 찍혀 있던 얄팍한 영어판 <밤>을 책방에서 무심결에 집어들었다가 뜻 모르는 단어들이 튀어나와도 사전 찾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읽어내렸다. 이 책에선 ‘선택’이란 단어가 유대인의 목숨을 가지고 독일 친위대들이 날마다 벌이는 죽음의 유희를 의미할 때 사전 찾기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수용소에 도착한 순간부터 거의 날마다 생명의 주관자인 친위대 장교 앞으로 줄지어 나갈 때 유태인들의 머리나 가슴 속에서 어떤 단어들을 기대하고 싶은가. 죽음의 공포와 생존본능 외에 무얼? 자존심? 생명의 존엄? 양보? 연민? 사랑? 대속? 구원? 영생?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서 독일 나찌도 ‘선택’이란 놀이를 선택했을까? 최상의 가치를 부여받았던 종교적, 인도주의적 단어들이 배부른 헛소리가 되는 수용소의 삶은 밤의 연속이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엘리라는 소년의 인생 사전에서 어느날 갑자기 ‘사춘기’라는 단어가 지워졌다. 대신 팔뚝에 번호가 문신으로 새겨졌다. 유대인들의 동의어인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의 일련번호였다. 소년과 가족의 재산을 몰수하고 게토로 몰아낸 헝가리 경찰, 가축화차에 80명씩 선 채로 빽빽히 채워 죽음의 수용소로 몰고가는 독일군을 보면서 유럽인들을 증오하게 되었다던 소년은 줄곧 박해자가 아니라 피압박자들을 주시하고 있다. 특히 아버지와 자신의 내면을...

도주도 투쟁도 마다하고 주어진 현실에 양처럼 순응하는 무능한 아버지. 죽음을 무릅쓰고 자식의 안전한 피난처가 되기는 커녕 오히려 겁먹은 아들에게 기대오는 아버지. 자랑스러워야 마땅한 아버지가 두려움에 떨며 울고 있다. 그런 아버지가 밉다. 한편 생명을 그악스레 거머쥐느라 탈진한 아버지를 외면할지도 모를 자신을 두려워한다.

수용소에서의 통과의례인 오늘이 끝이냐 하루 연장이냐의 ‘선택’ 이 개인적인 공포라면, 공개처형은 인간애, 형제애를 버리게 만드는 공동체적인 공포이다. 제 아버지를 두들겨패서 유태인의 미움을 받았어도 천사 같은 생김새 덕에 독일군의 사랑을 받았던 어린 소년이 무기은닉혐의에 연루되어 처형당한다. 교수형이 거행되고 교수대 주변을 강제로 돌아야하는 수인들은 즉사하지 못하고 몇십분이나 버둥거리는 어린 소년의 모습을 괴로워한다. 누군가 중얼거린다. “하나님이여 자비를... 도대체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소년 엘리의 내면에서 대답이 들려온다. “그가 어디 있냐구? 저기 있잖아. 저기 목매달려 버둥거리고 있잖아?”

유대인 공동체가 무너지고, 회당이 폐허가 되고, 게토, 가축화차, 수용소, 날마다 죽음과 삶을 오가는 것으로도 모자라, 전쟁의 막바지에 소년은 죽음의 행진까지 해야 한다. 한겨울의 칼날 같은 바람 속으로 내몰린 유대인들의 행진에는 1초의 휴식도 없다. 멈추면 무조건 총살이다. 엄살이나 핑계는 버린 지 오래. 생각을 버리고 느낌을 버려야 산다. 소년은 걷는 기계가 된다. 자신을 동정하는 순간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 나 아닌 너는 짐으로 변한다. 가축화차를 향해 독일 농부가 던져준 동정의 빵 한 조각으로 허기는 살의로 변한다.

죽음의 행진으로 기운이 다한 엘리의 아버지는 나날이 병색이 짙어간다. 주변 수인들은 아기같이 우는 아버지를 괴롭혀대고, 생존의 방해물로 전락한 아버지를 포기하라고 누군가 엘리의 귀에 속삭인다. 수용소가 주는 메시지는 생존이며, 거기엔 부모자식간의 의리도 없다 한다. 소년 엘리를 찾으며 물 달라고 소리 지르는 아버지를 시끄럽다고 독일군이 팬다. 소년은 매 맞는 것이 두려워 숨는다. 한밤중에 벙크에서 기어나온 소년이 정신이 혼미한 채 웅얼거리는 아버지를 바라본다. 피투성이가 된 아버지의 얼굴을 가슴에다 새긴다. 다음날 아침, 아버지는 사라지고 없다. 숨이 멎기 전 용광로에 던져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기도도 촛불도 장례식도 없는 아버지의 주검 역시 한 줌 연기로 사라진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유대인을 받아들이는 땅은 없다. 소년은 울지 않는다. 소년은 드디어 아버지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해방감, 진저리처지는 내면의 어둠을 보고야 만다.

드디어 독일이 항복하고, 구출되어 병원에 입원한 소년은 게토로 쫓겨난 이후 한 번도 본 적 없는 자신의 얼굴을 보기 위해 거울 앞에 선다. 거울 저 만치에서 송장 하나가 물끄러미 소년을 응시하고 있다.

책장을 덮고 한참 말을 잊었다. 책으로 읽은 북한 강제수용소 풍경도 잠시 머리를 스쳐갔다. ‘조건 없는 사랑’이 지상에서 과연 가능키나 한가? 감성적인 언어들이 부끄러운 듯 숨어버렸다. 살아오는 동안 ‘사람 찾기’라 명명한 방황을 참 많이도 했다. 우정이나 이웃사촌의 정이나 애정으로 만난 수많은 너, 애증으로 얽힌 너와 내가 과연 예수님이 누누이 가르쳐준 조건 없는 사랑의 좁은 문으로 함께 들어갈 수 있을까? 이것은 질문이기보다 너를 향한 강렬한 소망이고 집착이었다가 나이 들면서부터 나를 향한 질문 내지 시험으로 바뀌었다. 어느 선까지 나 자신을 인내하고 버리고 비울 수 있는가? 이 책은 나 자신을 향한 일말의 기대나 질문도 버리게 만든다.

인간으로서 가지고 누려볼 수 있는 모든 것이 거세된 극한 상황에 나 자신이 던져진다면, 그리도 애착한 사랑을 품고 비참한 생존 조건과 죽음의 공포를 의연히 이길 수 있을까? 나를 학대하는 너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공포의 아가리에 먹히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이런 질문 자체가 한가로움이고 교만이었다.
서문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악과 어둠의 강제수용소 이야기, 지나치게 자신과 밀착되어 있고 동시에 너무나 아득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는 “책임감”이라고 말한다. 오늘의 아이들과 내일 태어날 아이들을 위해. 역사의 증인은 간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증인은 그의 과거가 아이들의 미래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면서 책을 마무리한다.

그러나 대학살은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욕심과 교만, 시기와 증오가 존재하는 어디서나 정치적, 금전적, 정신적, 감성적 홀로코스트는 일어난다. 증인들이 고통을 아무리 증거해도 멈출 줄 모른다. 사랑한다면서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의 시계가 완전히 멈추는 종말에나 끝나게 될까. 가장 좁은 문이 사람이었음을, 사람 사랑을 통과해야 하나님께 닿을 수 있음을 뒤늦게 깨닫고 옷을 풀어헤치고 산발한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울부짖게 될까. 사랑하는, 사랑해야 한다는 너, 나의 또 다른 모습인 무수한 너마다 매겨놓은 사랑의 조건, 혹은 사랑할 수 없는 이유나 명분을 하얗게 지울 수 없는 한, 나 혹은 우리는 여전히 카인의 후예들이다.

책 한 권으로 사랑이 죽음보다 두려워진 나는 생명 없는 회색 공간에 숨어 나를 응시한다. 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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