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러스"... 

 
우연히 영화 한 편을 구경하게 되었다. 같이 구경한 남편이 TV 드라마 감상처럼 시간 떼우기가 아니라 진한 감동을 주고 메시지가 분명한 영화라고 좋아했다. 현실의 칙칙한 슬픔과 빙그레 미소를 떠올리게 만드는 희망의 몸짓과 유머가 씨줄 날줄로 감동적인 영상들을 직조해낸 듯했다.

영화 첫장면에서 각종 포스터와 공연 앨범에 박힌 어느 지휘자의 이름과 얼굴을 카메라가 클로즈업으로 훑는다.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성공한 지휘자임을 암시하는 것이겠지. 정작 그 유명한 음악가는 소파에 누워 휴식중이다. 미국에서 공연을 앞두고 누워서 쉬고 있는 지휘자에게 프랑스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아! 프랑스에서 온 지휘자로구나. 어머니의 임종 소식이다. 공연을 마친 지휘자는 프랑스로 돌아가 장례식에 참석한다. 장례가 끝난 뒤, 그 지휘자에게 비슷한 연배의 한 남자가 찾아온다. 어렸을 적 그들에게 음악을 가르쳐 준 선생님의 부탁이었다면서 그 선생님이 쓴 학교 일기를 지휘자에게 건네 준다. 지휘자의 이름은 모랑쥐, 일기를 건넨 이는 페피노란다. 일기장을 들추면서 영화의 시계는 바쁘게 과거로 달려간다. 2차 대전 직후로...

마티유라는 임시직 교사가 연못바닥이라는 이름을 가진 학교에 부임해 온다. 날달걀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마티유 선생님은 대머리에다 약간은 코믹해 보이는 독신남이다. 철대문의 한귀퉁이에는 땅꼬마 남자아이가 대문의 쇠창살을 붙들고 서있다. “아버지가 토요일에 데리러 온다고 했어요.” “오늘은 토요일이 아닌데?” “......”

무대 배경은 2차 대전 직후, 허름한 남자 기숙사 학교이다. 학교 이름이 연못 바닥이란다. 바닥이란 낱말이 암시하듯 어린 아이들의 학교 치고는 인생의 막장으로 보인다. 그런 학교에서 어른들의 가난과 좌절과 혼란과 사라진 꿈의 대가를 아이들이 톡톡히 치르고 있다. 독재자나 다름 없는 교장 선생님은 고아들을 볼모로 삼아 생계는 물론이고 챙길 수 있는 물질도 축적하고 기회만 있으면 명예까지 챙기려 든다.

한국에서 우연히 방문했던 어느 고아원의 원장이 갑자기 떠올랐다. 누더기 옷을 걸친 고아들은 도배도 제대로 안하고 불도 떼지 않은 냉방에서 살고 있었다. 나를 언니라 부르면서 떨어지지 않았던 그 소녀들은 지적장애아들이었다. 원장에게 아이들을 내놓으라고 그 지역 신부님이 으름장을 놓았지만 꿈쩍도 않는다고 했다. 원장은 아이큐가 모자란 아이들에게 주어야 할 의식주 보조금을 가로채 여유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영화 속의 교장 역시 학교에 붙은 관사에선 아내와 두 딸과 함께 보통의 쾌적한 삶을 누리겠지만 학교에만 출근하면 폭군이 된다. 규율을 어기거나 말썽을 부리면 면담도 상담도 없이 무조건 체벌이다. 폭력이다. 그게 액션-리액션의 법칙이란다. 보복이 두렵기도 하겠지만 전후에 살기 팍팍한 부모들은 아이들의 권리를 대변해 주기는커녕 먹여 주고 재워 주는 것에 감사해야 할 판이니 삭막한 회색 감옥이 아이들의 가슴마다 자리하고 있다.

 
마티유 선생님은 학교 밖 세상에선 이미 실패한 음악가이다. 이 학교에도 음악을 가르치러 온 것이 아니다. 두어 과목 가르치는 임시직 교사로서 자원교사가 별로 없어 보이는 구질구질한 학교에 왔겠지만, 천성적으로 마음이 밝고 따스한 그는 얼마 안 가 아이들의 마음을 읽어내고 그들을 자식처럼 사랑하게 된다.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일이 아이들의 정서 안정이나 교육에 중요하다는 것도 안다. 체벌보다는 합창을 통해 아이들이 자신감을 되찾고 제한적이긴 해도 그 안에서 행복을 느끼길 바란다. 결국 그는 해낸다. 아이들의 눈에서 자신을 향한 감사의 마음도 읽게 된다.

첫 장면에서 대문간에 서있던 땅꼬마 페피노는 아버지가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아버지를 기다리는 일이 삶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마티유 선생님이 오고 난 뒤부터 점점 대문간으로 달려가는 횟수가 줄어든다.

훗날 지휘자가 되는 모랑쥐는 무조건 선생님 말을 듣지 않는 것으로 학교와 어머니에게 반항하던 아이다. 체벌을 해도 소용 없다. 자신을 외롭게 방치한 원망스러운 어머니로 상징되는 모든 어른들을 믿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런 모랑쥐가 천성적으로 놀라운 가창력의 소유자임을 마티유 선생님이 발견한다. 모랑쥐도 자신이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른 아이들의 면면은 기억이 짧은 관계로 생략하자. 어쨌든 대부분의 아이들이 합창 연습을 하는 동안 저항의 횟수도, 말썽 피우는 횟수도, 싸움의 횟수도 줄어들었을 것이다. 밝아지고 사랑을 느끼고 우정도 돈독해졌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마티유 선생님의 결정적인 도움을 받은 아이는 둘이다. 마티유는 모랑쥐를 음악학교로 전학가게 만들었고, 음악적 소질을 최초로 찾아내고 알아 주었다.

다른 한 아이는 땅꼬마 페피노이다. 가장 어리고 키도 가장 작은 페피노는 마티유 선생님이 피치 못하게 학교를 떠나던 날 짐 싸들고 따라나선다. 잠깐의 망설임 뒤에 마티유 선생님은 페피노와 함께 떠났으니, 아마 아버지가 되어 주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여운이 길었던 건 줄거리나 OST 음악, 혹은 연기 때문이 아니었다. 방황하는 청소년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선생님을 주제로 한 미국 영화들도, 한국 영화들도 여러 편 있다. 미국 영화라면, 어느 순간에 그런 선생님이 아이들의 영웅으로 클로즈업된다. 그에 따라 관중들도 풀뿌리 영웅을 향해 박수를 치게 된다. 한국 영화라면 선생님이나 학생이나 개개인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어느 틈엔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눈물 짓게 만든다.

그런데 이 영화는 마음으로 만세 삼창을 부를 기회를 쉽사리 주지도 않고, 각자의 인생사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지도 않는다. 연못 바닥이라는 취약한 공동체에서 못된 사람이나 착한 사람이나 조금 더 강하거나 반대로 약한 사람들이 좌충우돌하는 가운데 결국 사랑과 희망이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답이라는 메시지를 종이비행기에 담아 가슴으로 날리고 있기에 여운이 남고 좋은 영화라는 평을 하게 된다.

영화의 악역을 담당한 교장도 악하게만 그려지지 않는다. 코믹하고, 어린애 같은 면도 있다. 반대로 선한 역할을 담당한 마티유 선생님도 흠 없는 희생양으로만 그려지지 않는다. 제자의 엄마에게 연정을 품기도 하고, 그 아들 녀석에게 그런 마음을 들켜서 행패를 부리는 제자에게 작은 복수를 하기도 한다.

마지막 장면이 깔끔해서 좋다. 합창으로 교장을 제외한 다른 교사들과 학생들의 마음이 정화되기도 하지만, 회개하고 거듭나지 못한, 간 큰 말썽쟁이 때문에 공금이 사라진다거나 방화 사건 같은 큰 일이 일어나는 바람에 교장은 마티유 선생을 해고한다. 아이들과의 이별 인사도 허락하지 않는다.

참담하고 허탈한 심정으로 교문을 향해 걸어가는데 교실에서 아이들의 합창 소리가 들려온다.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은 노래를 부르며 인사말이 담긴 종이비행기를 날린다. 결국 얼마 안 가 교장은 그곳을 떠나고, 마티유 선생님은 교사 생활을 계속했다는 후문이 자막으로 뜨지만 그게 다이다. 망설이다가 페피노의 손을 잡고 같이 탄 버스가 떠나자 영화도 끝이다. 세상 만사가 그 자체라는 어느 책에서 본 글귀가 떠오른다.

그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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