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초크는 <변화>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인용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사람은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확신하는 그들의 확신은 갈등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새로운 것을 배우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 역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를 정말 곤경에 빠뜨리는 것은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분명히 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참으로 공감하게 되는 말입니다. 간혹 잘못된 자기 확신으로 인해서 어려움에 빠진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유학와서 처음으로 동료 목사님 가정과 함께 장거리 여행을 한 곳이 나이아가라 폭포였습니다. 캐나다에서 바라보는 나이아가라 폭포가 전망이 좋다고 해서 그곳으로 여행하기로 하고 호텔을 잡았습니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하는 여행이라 얼마나 기대가 컸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캐나다 국경까지 도착했는데, 출입국 심사를 하는데 일이 벌어졌습니다. 함께한 목사님 때문에 출입국 관리소를 통과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목사님이 여권을 가지고 오지 않고 여권 복사본만 가지고 왔기 때문입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여권을 가지고 다니면 잃어버릴 염려가 있으니 여권은 집에 두고 사본을 자동차에 가지고 다니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어디를 가도 여권 사본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캐나다는 국경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여권이 필요했습니다. 결국 여권이 없어서 캐나다로 건너가지 못하고 미국 쪽에서 머물러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여행의 문제니까 이 정도지 영적인 문제라고 한다면 얼마나 심각한 일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인생을 제대로 알고, 이 세상을 다 안다고 하는 확신과 착각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며 삽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 내에서 하나님을 받아들입니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믿지 못해서 그런 겁니다. 이런 사람들은 영적으로 풍성한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영성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표현할 수 없는 실재에 대한 감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말씀에 따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인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자기가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눈으로 수많은 것들을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못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지식과 확신이라는 것이 늘 어설프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기력하게 살고 있는 이유는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가슴을 열고 받아들이면 우리의 삶 가운데서 기적이 일어나고, 모든 것을 이겨낼 힘을 얻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을 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3절 말씀에서는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을 “큰 구원”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구원이라는 말이 갖는 보편성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큰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큰 고통의 문제나 병에서 해결되는 것도 구원받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큰 구원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은 그분의 능력이 단순히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정도의 능력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보다 더 큰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게 해주는 능력이요, 우리에게 절대적인 생명을 주는 능력이요, 죄와 사망을 깨뜨리는 능력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장은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 되신 예수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의 중재자이십니다. 히브리서 1장 2절에는 “이 모든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요한복은 1장 14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 이 하나님은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자로서의 하나님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살아 있다는 말은 곧 진리가 살아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격화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살아보자는 것은 성경을 내 삶의 기준과 척도로 삼는다는 말이요, 지금 나의 행동 방식이 성경적인지 살펴보자는 말입니다. 말씀을 따라 사는 가운데 사람들은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자유케 하는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사상과 생각 속에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 속에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누리려면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해야 합니다.예수께서 주시는 자유는 기쁨과 평강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인 것입니다. 마음의 기쁨과 평강을 잃어버린 자유는 이미 자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창조의 능력을 가진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1장 2-3절 말씀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통하여 만물이 창조되었으며, 예수님의 능력의 말씀을 통해서 만물이 유지되고 있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절대선을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시고 유지시키는 분이기에 오늘 우리의 삶도 당신의 창조적인 능력으로 지탱시키시고 유지시켜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이 우리와 함께할 때 우리의 생각은 긍정적으로 변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믿는 자 안에서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말씀이 실재하는 능력이 됩니다. 가끔씩 제 자신에게 질문을 해봅니다. 나는 이 말씀을 정말로 믿고 있는가?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쉽게 절망하고 불안해 하는가? 왜 나는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가?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이, 이 만물을 지탱하시는 분이 나의 구주라는 사실을 온전히 믿을 수 있다면 우리는 절망하거나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은 언제나 기도와 함께 나타납니다. 우리의 믿음은 기도와 함께 회복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과 욕심을 내려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욕심을 채우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비록 가난하고 상처투성이의 삶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바로 성경적인 믿음의 신앙이요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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