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들은 자녀들의 이름을 지을 때 많은 고민을 합니다. 아이의 특징도 살리면서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지으려고 노력합니다. 그 과정이 너무 어려워서 작명가를 찾아갈 정도이지요. 이름에는 존재의 가치도 포함되어 있고, 그 사람이 살아야 할 목적과 사명의 가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이름을 가졌지만 삶의 실제는 그와 정반대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바예수라는 이름은 어떤가요? 예수의 아들 즉 구원의 자녀라는 뜻이니 참 좋은 이름이 분명합니다. 그런 이름 때문이었을까요? 성경에 보면 그는 지역의 최고 권력자의 신임을 얻어 자문 역할을 하는 지위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이름대로의 삶을 살려고 노력한 결과입니다. 그 지역의 지도자는 어떤 정치적 결정을 할 때마다 바예수를 찾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모든 사람을 구원할 현명한 판단이 무엇인지를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바예수의 실체가 드러나게 됩니다. 성령의 사람 바울은 그를 ‘구원의 자녀’가 아니라 ‘마귀의 자녀’로 판명합니다. 그럴 듯한 겉모습과는 달리 그는 의의 원수, 바른 길을 어지럽게 하는 자의 실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자였는지, 인생의 어느 시점부터 그가 타락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순수하게 시작하였으나 경쟁과 생존의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변해 버린 세속문화의 희생자였을지도 모릅니다. 마치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처럼, 한국교회처럼 말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런 모습으로 모두를 속이며 언제까지나 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에 의하면 모든 진실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선이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분의 때가 오자 바예수의 거짓은 온 천하에 드러나게 되었고 애써 쌓아 놓았던 성공과 명예의 탑은 한순간에 무너졌습니다. 가장 화려했던 것이 추락하면 가장 추한 것이 된다는 말처럼 구원의 자녀는 멸망의 자녀로 주저앉았습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현재의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의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많이 아는 것 같지만 제대로 알지를 못하고 강한 것 같지만 모양만 있을 뿐 능력이 없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자화상을 봅니다. 어찌하면 비참한 모습으로 추락하기 전에 탈출구를 찾을 수 있을까요?

알렉산더 대왕이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병사가 도망치다 잡혀왔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름을 바꾸던지 인생을 바꾸라고. 주님께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같은 말씀을 하실 것 같습니다. 그 말씀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요? 이름을 바꾸겠다고 답할까 걱정이 됩니다. 이름에 맞지 않는 삶에 익숙해져있다면 그 이름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 이름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졌는지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감히 이름을 포기할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그 이름을 향한 절대자의 뜻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다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우리가 포기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에 맞지 않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의 삶과 꿈으로 우리의 방향을 다시 돌려야 합니다. 그분께 속한 자의 자리를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속히 그분의 자리로 돌아가기를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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