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품은 타고 난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날 때부터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본래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그 DNA를 우리 안에 주셨지요. 사랑, 성실, 공의, 용기 등입니다. 하지만 이런 성품들이 지금도 각 사람의 인격 속에 그대로 살아 있는가 하고 물으면 자신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그 성품의 씨앗들이 메말라 버렸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잃어 버렸고 용기를 잃어 버렸습니다. 삶이 너무 각박하고 누군가에게 짓눌려 한 해 두 해 살다 보니, 진실이 없어졌고 공의가 사라졌습니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도 잃어 버렸고 올바른 가치관을 잃어 버렸습니다. 인색한 삶, 비겁한 삶으로 살게 된 지가 몇 년인지 모릅니다. 거기에 익숙하다보니 우리가 본래 어떤 사람이었는지조차 기억해 내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그저 살기 위해서 하루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하는 걸까요?

성경에 보면 미디안 족속의 압제에 눌려 살던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천사가 찾아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천사는 기드온을 향해 ‘용맹스런 용사’라는 표현을 씁니다. 저는 이 말을 들은 기드온이 얼마나 쑥스러워했을까 상상해 봅니다. 왜냐하면 당시 기드온의 삶의 모습은 전혀 용맹스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미디안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포도즙을 짜는 큰 통 속에서 밀을 타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기회주의자였고, 약한 자였으며, 비겁자였습니다. 치켜 세워 주며 자신감을 격려했을 때에도 계속하여 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는 왜 그렇게 기드온을 불렀을까요? 비슷한 예가 신약성경 요한복음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을 보시고 그 사람이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그에게는 거짓된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정말 나다나엘은 이스라엘을 대표할 만큼의 사람일까요? 혹시 잘못 보신 것이 아닐까요?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은 인간의 현재나 실제의 모습보다는 그의 가능성과 본질을 꿰뚫어 보며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에게 용기가 있다고 말씀하시고 나다나엘에게 진실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으로는 그들에게서 용기와 진실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도 찾아 볼 수 없는 성품들이지요.  하나님의 눈으로 그렇게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 안에 용기와 진실이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의 것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더 놀랍고도 감사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그런 표현으로 부르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 표현에 걸맞는 사람이 되도록 그를 격려하시고 훈련시키셨습니다. 기드온의 경우를 보십시오. 표적을 보여 주심으로 마음을 격려하셨고, 작은 승리를 경험케 하심으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자라나게 하셨습니다. 마침내  3백 명의 용사로 미디안의 대군을 이기게 하심으로 기드온 생애 중 가장 용맹스러운 순간을 맞이하게 하셨지요. 칼과 창이 아닌 오직 하나님이 주신 용기로만 대승을 거둔 사람, 그가 바로 기드온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에게 지음 받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 안에 회복되고 자라야 할 성품은 무엇일까요? 사랑? 진실? 용기? 창조 본래의 모습을 하나씩 회복해가는 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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