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good의 비교급을 gooder 그리고 최상급을 goodest로 하지 않고 better/best를 써야 하느냐고 질문했다가 혼쭐난 일이 있었다. 아직 영어를 일본말 식으로 발음하던 시골학교의 그 선생님은 교탁을 주먹으로 내려치시며 벌컥 화를 내셨다.

“이 녀석들아, 영어는 이유를 따지지 말고 있는 그대로 외우면 되는 거야. 무조건 외워. 알았어?”

아무튼 평생 외국어 배우느라고 씨름할 때마다 그 가르침이 매우 좋은 약이 되었다. 물론 말의 이치를 배우면 언어 학습이 더 빠를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무조건 외우는 것이 외국어 정복의 지름길 아닌가. 그것이 한문과 독일어 학습법이었고 성경 원어 학습법이었다.

그리고 그때 배운 원급, 비교급, 최상급에서 한 가지 더 배웠다. 비교급처럼 남보다 더 잘하겠다는 결심, 더 나아가서는 최상급이 되겠다는 인생철학이 소년의 가슴을 흔들어 놓았다.

“무슨 일에나, 아니 적어도 한 가지만이라도 최상급 인생이 되도록 자신을 키워야 한다.”

그런 결심을 중학교 일학년 어린 가슴에 품게 되었다.

그렇다. 비교급에서 오는 행복과 불행의 체험 없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같은 책상에 앉은 단짝보다 더 좋은 점수를 받으면 어깨가 저절로 펴지지 않던가. 하지만 더 나쁜 점수를 받으면 누구나 기분 되게 나빠진다. 이웃집보다 더 고급 자동차를 사면 날아가는 기분이지만 동창생이 더 값비싼 차를 몰고 나타나는 순간 행복감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게 된다. 그렇다. ‘비교 우위’가 가져다 주는 행복과 보람은 모든 사람이 체험하는 일상적인 것이다.

하물며 최상급의 인생을 살아간다면 그런 행복과 보람이 얼마나 크겠는가. 올림픽 경기 금메달리스트가 웅변으로 말해 준다. 은/동 메달리스트 별로 빛도 안날 정도다. 그래서 ‘최고’자가 붙은 사람이 되려고 운명을 걸어 놓고 투쟁하게 된다. 세계 제일이 되고 싶은 욕망이다. 최고 갑부, 최고 가수, 최고 미인, 최고 득표, 최고 예술가, 최고 선수, 최고 씨름꾼... 그래서 노벨상 수상자들을 그렇게도 부러워한다. 심지어 성자로 살아야 하는 목사들의 세계에서도 세계 최대교회를 만들려고 인생 전부를 투자하지 않는가.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누가 제일 높은 자리에 앉게 되느냐’의 계급투쟁이 있었다 (눅 9:33 이하).

그런데 ‘최고’ 지향적 인생을 철저히 외면한 분이 계셨다. 바로 그리스도이신 예수 그분이었다. 온 인류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최고가 되려고 인생 전부를 걸고 살지만 그분은 그걸 뒤집어 놓으셨다. ‘저 낮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내리막길을 걸으시다가 최후에는 치욕적인 처형도구인 십자가에 달려 반나체로 사형 당하셨다. 장소도 해골 언덕이었다.

그토록 인생목표를 최상급에 두시지 않고 오히려 최하급에 두신 분이었다. 최상급 인생이 되려거든 최하급 인생의 길을 선택하라는 가르치심이다. 실로 엄청난 인생 혁명 노선 아닌가. 그분을 따르려거든 대접만 받는 상전이 되지 말고 천대를 받는 청지기 곧 머슴이 되라는 뜻이다. 그것도 목숨을 바쳐가며... 하늘나라에 가면 그런 사람이 최고로 박수 받게 될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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